(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의 비례대표 셀프 공천 논란이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당내 주류 진영과 전통적 지지자들의 거센 반발로 자존심이 상한 제1야당 대표는 총선을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사퇴 가능성을 시사했다.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야권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김 대표는 왜 이처럼 논란이 될 걸 알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비례대표 명단에 올렸을까. 왜 자진 사퇴까지 시사해 가면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 정말 혹자들의 말대로 '욕심 많은 늙은이'여서일까.
기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 대표는 이번 논란을 통해 더민주에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권정당의 길을 걷겠느냐, 걷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어리석은 질문'이고 '당연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형이상학적 질문'에 '형이하학적 대답'을 요구하는 어려운 문답이다.
'김종인이 더민주에게 묻습니다.' 모든 것은 야권 패배의 흑역사에서부터 기인한다.
18대 대선에서 얻은 교훈, '정당 이념을 확장시켜라'
3번. 야권(민주당 계열)이 역대 총선·대선에서 이긴 횟수다. 3번 모두 개인플레이에 의존해 얻은 승리였다.
15대 대선에서는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록에 기댔고, 16대 대선에서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람에 몸을 맡겼다. 17대 총선은 열린우리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무현의 승리였다. 바꿔 말하면, 걸출한 인물을 앞세우지 않은 선거에서 전부 패배했다는 얘기다.
정치권에서는 그 배경으로 영호남 지역주의 구도 건재, 소선거구 선거제도 등 거시적 요인과 선거전략 부재, 계파 문제 이념 편향 등 미시적 요인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후자의 영향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은 PK(부산경남)에서 40% 가까운 득표율을 보였다. 비록 TK(대구경북)의 아성(대구 19.5%, 경북 18.6%)을 넘진 못했지만, 야권 입장에서는 지역주의가 점진적으로 타파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재인은 박근혜에게 패배했다. 안철수와의 단일화 협상 진통(선거전략 부재, 계파 문제), 중도성향 유권자의 이반 현상(이념 편향)이 발목을 잡았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이를 직접 체감한 문재인은 제1야당 대표직을 내려놓기 직전, 김종인을 영입해 그에게 20대 총선을 맡겼다.
김종인이라면 넓은 외연을 이용해 야권연대 등 이길 수 있는 선거 전략을 추진할 수 있고, 정당 이념을 확장시켜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마음을 이끌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총선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한 결정이었다.
이념 색깔 지우는 김종인, 반발하는 친노계
당권을 잡은 김종인은 문재인의 기대 이상이었다.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 오른 김종인은 특유의 리더십(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받는)을 십분 발휘해 혼란에 빠진 더민주를 안정권에 진입시켰다. 당내 비주류의 연쇄탈당을 가로막았고, '야권연대' 제안 한마디로 안철수의 국민의당을 분열 기로로 몰아세웠다.
원샷법(기업활력제고를위한특별법)에 손을 들어주고 필리버스터 중단을 지시해 식물국회 비난을 희석시켰고, 햇볕정책 보완론을 앞세워 종북 프레임을 사전에 차단했다.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조응천 전 청와대 비서관, 새누리당 진영 의원을 영입했고, 강기정·정청래 등 강경 운동권 출신 인사와 친노(친노무현)계 좌장 이해찬을 컷오프했다.
이 같은 김종인의 지휘 아래 더민주는 중도성향 유권자, 나아가 보수성향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당 이념 폭이 넓은 정당'으로 변모했다. 수권정당으로의 진화 과정을 탄 것이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더민주의 120석 확보를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 주류인 친노 진영의 불만이 고조됐다. 이들은 당 정체성에 맞지 않는 김종인의 행보에 이질감을 느꼈다.
민주당 특유의 이념 색깔을 지우고 선거 승리의 길을 택한 '현실주의자' 김종인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도 충분히 유권자들의 표심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 친노계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다만 총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인지라 양쪽 모두 침묵을 지키면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벌였다. 아마 친노계는 '어차피 김종인은 20대 총선이 끝나면 안 볼 사람'이라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오판이었다. 비례대표설을 완강히 부인하던 김종인이 비례대표 순번 최상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러자 친노계가 거세게 반발했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반응도 김종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욕심 많은 늙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침묵이 깨졌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김종인은 당무를 거부했고 그의 측근들은 대표직 사퇴까지 검토 중이라고 알렸다. 김종인은 22일 당무에 복귀했지만 비대위원들에게 "비례대표 2번을 비우라"고 발언하면서 사퇴 여지를 남겼다. 오는 23일 비대위 참석도 미정이다.
그야말로 폭풍전야다.
'현실' 선택한 문재인, 이제는 친노가 답할 차례
김종인의 비례대표 2번 셀프 공천은 문재인의 뜻이기도 했다.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김종인 같은 사람이 원내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다는 의중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재인은 22일 김종인 자택을 찾아 그의 사퇴를 만류한 뒤 기자들과 만나 "김 대표가 정권교체라는 일념 하나로 우리 당에서 많은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마치 사심에 의해 결정한 것처럼 매도당했다"며 "'끝까지 당을 책임지고 야권 총선승리를 만들어 달라. 화룡점정을 해줘야 한다'고 (김종인에게) 부탁했다"고 밝혔다.
그에 앞서 문재인은 같은 날 창원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내가 대표를 하고 있었더라도 김종인을 비례대표 상위 순번으로 모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던 문재인이 자신의 기존 프레임을 깨고 현실주의자 김종인의 손을 부여잡은 것이다.
이제는 문재인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있는 친노가 김종인에게 대답할 차례가 됐다. '현실'이냐, '이상'이냐 기로에 섰다.
기자는 20대 총선, 19대 대선 승패를 떠나서, 그리고 설사 이번 논란이 '노욕'에 기인한다해도 김종인의 이 같은 무언의 질문은 향후 야권의 행보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확신한다.
김종인은 지난달 28일 취임 한 달을 맞아 연 기자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켜야 할 가치는 지키고 현실에 맞지 않는 가치는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물론 변화라는 게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기 어렵고 일부 저항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민주가 미래를 향한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총선은 물론 집권을 위한 대선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화만큼은 관철시킬 각오를 다지고 있다."
'변화를 관철시킬 각오'를 다진 김종인이 더민주에게 묻고 있다. 더민주는 어떤 각오를 가지고 이에 응답할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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