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00m 전방에 와 있는 셈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故 김영삼 전 대통령)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진정한 민주화로 향하는 이정표를 세운 일대 혁명이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최초의 포석을 마련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내세운 반공 프레임과 선(先) 경제발전-후(後) 민주주의 근대화 이론으로 인해 그 발전이 정체돼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은 이 같은 척박한 토양에서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아래로부터 수립시킨 데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심에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의 불씨는 1983년 5월부터 타올랐다. YS가 5·18 3주년을 기해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들을 내걸고 23일간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YS의 상도동계와 당시 미국 망명 중이었던 DJ의 동교동계가 손을 맞잡아 19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 김대중)을 만들었고, YS는 민추협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반(反) 전두환 독재정권 투쟁에 나섰다.
1985년 3월부로 정치활동 규제가 해제된 YS는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신한민주당)에서 활발히 대여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YS는 당 총재였던 이민우가 신군부정권의 내각제 개헌(4·13 호헌조치)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의사를 피력하자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에 손을 들어줄 수 없다"며 민추협 동지들과 함께 신민당을 집단탈당, 1987년 4월 새로운 정통 야당 민주당(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당 총재로 추대된 YS는 당 정강정책을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교체를 기해 이 땅에 군사독재가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 정권교체의 방법은 국민들의 의사에 따른 대통령 중심 직선제로의 합의개헌이어야 한다. 현 정권은 독재정권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비참한 말로를 맞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민주화 의지를 실증하라"며 신군부를 압박했다. 이어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통해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전두환에게 날 선 발언을 했다.
"현행 헌법 하에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는 불참하겠다. 현 정권 하의 선거는 북한의 선거와 다름 아니다."
YS의 통일민주당 창당 작업은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4·13 호헌조치와 맞물려 진행됐다. 당 바깥에서는 민추협과 함께 박종철국민추도회를 서울 광화문에서 열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열기를 뜨겁게 만들었고, 당 안에서는 군부정권의 연장을 의미하는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해 6월 10일 박종철고문살인은폐조작·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YS는 민주당, 민추협 동지들과 국회의사당 단식농성을 결행해 신군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도 했다. 하나, 39시간의 단식농성에도 전두환이 독재 연장의 뜻을 굽히지 않자 YS는 "현 정권에 피와 눈물 없이 민주화의 길을 함께 가자는 충정을 말해왔으나 이 정권은 금기의 길을 가고 있다.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승리하는 우리가 되자"고 군부정권을 향해 선전포고했다.
역사의 날, 1987년 6월 10일. 전두환이 이끌었던 민정당은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개최하고 노태우를 후보자로 지명했다. 같은 시각 YS와 민주당, 민추협은 영구집권음모규탄대회를 열고 거리로 나섰다. 시민들과 함께 피와 눈물을 흘리며 민주주의를 목 놓아 불렀다. 동교동 자택에 연금된 DJ도 단식농성으로 동참했다.
그러면서도 YS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날 민추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요한 국면에 와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투쟁하겠다. 대화를 통해서 만들겠다. 대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룩하자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참된 소망이다. 우린 아직 '정권타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벌써 퇴장 당할 정권이지만 참고 참아왔다. 우리가 참고 참아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은 무산됐다. 전두환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YS와 민주당, 민추협 동지들은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강행했다. 전국에서 약 200만 명의 시민들이 '민주쟁취, 독재타도'를 외쳤다. 결국 신군부는 6월 29일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6·29 선언으로 무릎 꿇고 말았다.
1987년 단일화 실패, 1990년 3당합당으로 YS 깎아내릴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6월 항쟁에서 YS의 노력을 폄훼하기도 한다. 1987년 대선에서 DJ와 단일화 합의를 이루지 못해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줘 사실상 군사정권을 연장시킨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YS는 <시사오늘>과의 생전 단독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방적으로 후보를 양보할 수는 없었다. 경선을 치르든, 합의를 하든 무언가 방법을 통해 후보를 정하는 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 아니겠는가.
군정종식이 된다면 누가 후보로 나서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1970년 신민당 경선 때도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었다. DJ가 후보로 선출된다면 그의 당선을 위해 지원유세를 못 할 게 뭐가 있는가. 아무튼 후보단일화를 못한 책임에 통감한다."
실제로 YS는 당시 DJ가 제시했던 경선룰을 전격 수용해 같은 상도동계 인사들에게까지 "후보직을 왜 양보하셨느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후에 YS는 자신의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12페이지에서 그때 상황에 대해 "이제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경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째, 경선은 공평한 게임이었고, 김대중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둘째, 예측할 수 없는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DJ는 <김대중자서전> 530페이지에서 "김영삼은 내가 요구한 미창당지구당 조직책 임명권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선거일정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사실상 후보단일화 협상은 결렬됐다"고 밝혔다.
또한 1990년 3당합당은 6월 항쟁으로 애써 이룩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볼 수 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하나회 청산'에 나선 게 그 방증이다.
YS에게 3당합당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 상도동계 박태권 전 의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노태우-김복동-정호용 등등으로 군부 대통령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들이 하나회 조직이다. YS가 집권 초반에 하나회를 싹쓸이 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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