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김병묵 기자]
조해진 전 새누리당 의원은 빈한한 소년기를 딛고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거쳐 국회에 입성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특히 조 전 의원은 일명 ‘황금세대’라는 82학번 동기인 나경원 의원,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달리 법조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정치권에 뛰어든 정통 정치인이다. 보좌관 생활만 15년 이상 거치며 잔뼈가 굵은 그의 저력은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일조했고, 여세를 몰아 18대 국회에 발을 디뎠다.
19대 국회에서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지만, 조 전 의원은 지난 선거에서 벌어진 새누리 내란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가 되면서 원외인사가 됐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고 즉각 TV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는 등 몸을 움직였다. 워낙에 수많은 실패를 넘어서 왔기에 딱히 고난이 낯설지 않다고 했다. 역경조차 친숙하다는 특이한 엘리트, 조 전 의원을 <시사오늘>이 13일 여의도 한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공천 탈락 이유, '유승민과 가까워서'
-지난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결국 낙선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선거구 통합이 너무 늦게 결정된 바람에 새로 합쳐진 선거구(함안·의령)에 가서 선거운동을 하는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내 얼굴도 못보고 투표한 분이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 가서 새롭게 합쳐진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했고 나보고도 주변에서 미리 가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현역 국회의원인데 국회에서 법도 통과시켜 놓지 않은 상황에서, 법적으로는 남의 지역구인 곳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건 무책임하고 도의상 안 맞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못했다. 결국 유권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는 그 지역이 1번을 찍는 성향이 컸다. 기존 지역구인 밀양·창녕 선거구에서는 내가 이겼는데 새로 통합된 지역에서 져서 총합계에서 밀리게 됐다.”
-친박계의 구체적 방해 활동이 있었나.
“내가 아는 것도 있고, 짐작이 가는 것도 있는데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다. 친박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경쟁하는 후보를 위해 ‘인증샷’을 해주고, 진박후보라고 하며 지원유세도 해주고 그런 것이 있다.”
-지난 번 공천에서 탈락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 가깝다는 게 그 이유인 듯싶다. 유 전 원내대표 시절 원내수석부대표를 하면서 청와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 그거 말고는 이유가 될 게 없다. 여론조사도 잘 나왔고, 의정활동과 관련한 수상결과도 많은 등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했다. 지난 18대 대선 때도 선대위대변인으로 열심히 했고 새정부 출범하자마자 창조경제 1호법안이라고 할 수 있는 ICT법도 내가 대표발의했다. 미방위 간사로서 본회의에서 통과되도록 하고 대선 공약이었던 통신비 인하를 위해서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단말기 유통법을 발의해서 통과시켰다. 무엇을 봐도 공천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조 전 의원은 김 전 대표가 담대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공천 당시 김무성 전 대표가 제대로 역할을 못했다고 보는가.
“김 전 대표 본인도 어려움이 있고, 노력해도 안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당이 망가진데 대한 1차적 책임은 친박계에 있지만, 2차적 책임은 당을 대표하는 당 대표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국회법 사태’ 때도 당 대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중간에 낙마하지 않고 원만하게 수습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당 대표가 그 역할을 잘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 공천과정에 들어서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이한구 전 의원을 선대위원장에 앉힌 것이다. 이한구 전 의원이 아닌 김황식 전 국무총리 등과 같은 명망 있고 신망 있는 인사를 앉힐 길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상향식 공천이 폐기되고 전략공천이 다시 부활되는 것과 관련해서도 김 대표가 막을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 못 막았다. 살생부 파동이 났을 때 그것을 기회로 ‘보복 공천’이 안 이뤄지도록 쐐기를 박을 수 있었는데 오히려 본인이 거꾸로 되치기 당해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공천 끝날 때까지 입 닫겠다는 굴욕적인 얘기를 했다. 실제로 본인의 공천과 본인 주변의 공천이 확정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지 않았나.”
“이한구 공관위원장과 공관위가 계속 그런 막장공천을 진행하는데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방치했다. 각 사안마다 국민여론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자기 직을 걸고 정치생명을 걸고 했다면 막장 공천을 막을 수 있었는데, 못 막은 바람에 당이 엉망진창이 되고 총선에서 패배하고, 본인도 대선주자 지지율이 주저앉는 등 여러모로 망가졌다.
본인만 그 상황에서 자기 자리를 걸고, 정치생명을 걸고 명분에 입각해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바른 길로 나갔으면 그렇게 난장판으로까지 안 갔다. 그게 아쉽다. 지도자의 실력은 평화 시가 아니라 위기 시에, 비상시에 나타난다. 어려움을 해결하고 극복하며 모두를 끌고 갈 수 있느냐에 따라 흔히 말하는 내공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도 김 전 대표가 옥새파동을 통해 일부 지역을 무공천 지역으로 만들어 무소속 비박계에 기회를 주지 않았나.
“당이 이미 무너지고, 패배의 길로 들어선 상황에선 별 영향을 못 미치는 미미한 저항이었다. 소위 옥새파동을 통해서 당이 제대로 바로 서고 선거결과도 좋았으면 그게 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번 선거 치르며 정치인으로서 가장 절실히 느꼈던 점은 무엇인가.
“그 동안 실세공천, 보복공천, 계파공천, 민심을 완전히 무시하는 독선적 공천, 비리공천 등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국민적 통제가 절실하다. 공천이 계속해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국회에 진출해 4년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공천 과정에서 소비자인 국민이 관여하는 국민적 통제 과정이 절실하다는 것을 이번에 실감했다. 일단 공천을 해서 당선이 결정되면 국회의원 소환도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4년 동안 그냥 간다. 그러니까 국민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스에게만 줄을 선다. 이런 구조를 빨리 고쳐야 한다.”
-조금은 억울하게 의원직을 잃은 감이 있다. 심적으로 힘들진 않은지.
“나는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괜찮다. 이런 고생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상대적으로 고생을 안 해본 사람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에 비하면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인 것 같다. 정치권에 들어와서 박찬종 전 의원이나 이회창 전 총재, 이런 분 모실 때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에, 고난이 낯설진 않다. 나는 괜찮은데 나를 위해 고생하고 봉사해준 분들, 그분들이 낙망하고 또 일자리를 새로 구해야하고 내가 옛날만큼 도와드릴 수가 없는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당장 현실적으로 집사람한테 갖다 줄 생활비도 벌어야하고. 지역구 사무실 운영비도 벌어야 하니 아무래도 좀 힘들긴 하다. 하지만 나는 원래 소위 ‘극빈자’ 집안이었다. 어렸을 땐 생활보호대상자라고 그랬다.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 밀가루를 타 먹고 했다. 요즘 기초생활수급자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했을 거다. 굶는 건 밥 먹듯이 했고, 구두닦이, 짜장면 배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가족도 돼 봤다. 그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웬만한 고생을 해도 ‘그 때에 비하면’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게 생활하던 어린 시절에 특별히 기억되는 부분이 있는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반장이었는데 해마다 학교에서 불우이웃 돕기 행사를 했다. 그 때 운동장에 전교생이 다 모여서 조회를 하면서 교장선생님이 단상에 불우이웃돕기 대상자 대표를 불러서 (물품을) 전달했다. 내가 단골이 됐다. 나하고 나처럼 못사는 친구가 단골로 단상에 올라갔는데 도움을 받으니까 고맙기도 했지만 위축되기도 한 느낌이 남아 있다. 또 6학년 때 우리 반에서 따로 친구들이 쌀을 거둬가지고 집에 가져온 적이 있다. 바께스(바스켓)에 담아가지고 담임 선생님이 앞서고 반 임원들이 몇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걸 멀리서 보고는 부끄러워서 숨었던 기억이 있다.”
-정치 입문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정치하기로 결심했다. ‘국회의원을 해보고 싶다, 장관을 해보고 싶다’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내가 대학생이던 당시에, 이렇게 정치에 문제가 있고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내가 법조계에 가도 정치 문제 때문에 언젠가 좌절할 것 같았다. 언론계에 가도, 기업이나 학계로 가도 잘못된 정치의 벽에 막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이걸 바로잡아야 나도, 다른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도 자신의 소신대로 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봤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나름 바람직한 정치, 살기좋은 나라에 대한 그림이 있다. 이걸 이루고 싶은 성향 때문에 정치를 결심했고, 준비했고, 학교를 마치고 바로 들어오게 됐는데, 15년 보좌관 생활, 또 의원으로서 정치 현장에서 이것 저것 해보니 더욱 우리 정치의 문제점이 잘 보이더라.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이상적 정치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박찬종 전 의원, 이회창 전 총재 등의 보좌진으로 활동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은 무엇인가.
“수도 없이 많다. 박찬종 의원이나 이회창 총재나 처음에는 다 잘 나가시지 않았나. 여론조사에서 1위도 했었고. 그런데 승부에서 마지막 순간에 무너졌다. 두 분 다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결과가 실패로 끝난 것은 어쨌든 간에 우리 참모들의 책임도 있다. 적극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전하고, 바닥민심을 전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좀 더 도전적으로 하도록 도왔어야 했다. 우리가 어리기도 했지만, 더 적극적으로 참모 역할을 못해서 실패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좀 더 달라붙어서 죽기살기로 끝장토론 자리도 만들고 그랬었더라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두 분 다 있다.”
-그런데 이명박(MB)전 대통령은 결국 대통령을 만들었다. 다른 점이 있었나.
“박찬종 때는 박찬종을 대망하는 시대의 흐름이 있었고, 이회창 때도 이회창을 대망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그 두 분은 그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못 만들고, MB는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굳이 인상 깊었던 점을 더 꼽자면 MB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했다. 그리고 폭넓게 수용해서 결과를 만들었다”
-친이계 직계로 분류된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언론이 나를 정몽준계, 어느 때는 김무성 측근으로 분류도 하더라. 최근엔 또 유승민계라고 한다. 난 기본적으로는 계파정치 자체를 개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인간적인 관계로서 누구의 사람이냐, 했을 때 난 MB의 직계다. 그건 앞으로도 평생 가는 것이고 그 외엔 없다. 그 전에 모신 분들, 박찬종계나 이회창계냐고 물으면, 그 당시엔 그런 표현도 없었고, 내가 국회의원 정도로 독립된 정치인이어야 계보 안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 전엔 비서나 보좌관이었으니까. 유승민 의원은 인연도 있고.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입장에서 정치적 동지다.”
-MB와 총선 전후로 만난 적이 있나.
“총선 전에 통화를 한번 했다.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 ‘잘 돼야 할 텐데’라고 했다. 선거 끝나고 한번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만나자마자 ‘니는 될 줄 알았는데…’라고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본인은 친이계 직계고, 유승민 의원은 원래 친박계 아닌가. 그런데 언제부터 가까워졌나.
“대선 경선 당시 적진에 있던 사람이다. 당시 유승민, 이혜훈 이런 사람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참 정말 열심이었다. 나름대로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일을 했고, 지략도 있고 전술전략도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학자 이미지였다. 새로운 면모를 보게된 건 2010년 전당대회 때 유승민 의원이 후보로 출마했을 때다. 담대한 개혁을 내세우고, 비전을 제시하는 걸 보면서 행동가의 이미지를 느꼈다.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2014년 말에 상황을 보니 이완구 당시 원내대표가 총리로 갈 분위기였다. 다른 후보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을 때였는데, 내가 먼저 찾아가서 원내대표에 나가시라고 했다. 그 때 상황에서 어쨌든 당을 좀 더 개혁하고 당에 역동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상대적으로 연배도 비슷하고 젊기 때문에 당에 활력도 생기고, 융통성도 어느 정도 생길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콘텐츠가 풍부한 사람이기도 했고.”
-임기를 마치진 못했다.
“청와대와 소통이 안 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이런 발언도 그렇다. 이 사람은 고민이 있는 사람이고, 자기가 뜨려고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진정성이 있었다. 그 발언에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고, 그러니까 기립박수도 치고 그런 거다. 내용도 틀린 말이 없다. 증세없는 복지는 안 된다는 건 내가 먼저 얘기했던 사안이다. 당선되고 나서 언론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적 있다. ‘복지를 늘려야 한다면 이건 증세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만 증세 부담을 대기업에게 지게 하느냐, 전체 국민들에게 공통적으로 나눠 주느냐 하는 담세의 문제다.
지하경제 양성화, 재정지출 구조조정으로 복지를 한다? 이거 다 MB 때 해봤는데 안 되는 이야기더라. 물론 이런 노력을 계속 해야하지만, 뭉텅이로 예산이 몇 조가 떨어지지 않는다. 지하경제에서 갑자기 몇 조가 나오고, 재정지출이 갑자기 몇 조씩 아껴지지 않는다’고 이미 내가 했던 이야기다. 물론 ‘허구’라는 단어가, 약간 청와대 쪽에서는 어감 상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우려는 좀 했다.
그런데 이게 사퇴 막 이렇게까지 가게 된 것은, 청와대 주변에서 자기네 편한 대로 해석해서 전달하고, 또 왜곡해서다. 유 의원 쪽에서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이게 직접소통이 되면 끼어들 틈이 적다. 니가 무슨 행동을 했느냐, 무슨 말을 했느냐 물어보면 되지 않나. 당시 김무성 대표도 그랬지만 유 의원도 청와대와의 소통을 아주 간절히 바랐다. 내가 아는 한 취임인사 차 전화통화 한 번 한 게 전부일 거다. 김 대표와 청와대 들어가서 공식적으로 만난 것 빼면 만난 적도 한 번도 없다는 거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처음부터 그럼 소통이 어려웠나.
“대통령 취임 직후 연찬회가 있었다. 청와대 수석들과 당 주요 당직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는데, 내가 거기서 발언했다. ‘우리 겸손해야 한다. 마음 낮추고 모두에게 감사하면서, 패배한 야당 지지층을 빨리 끌어안아야 된다. 내가 역대 정권 보면서 경험적으로 깨달은거다’ 라고 눈총 받아가면서 길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자리만 봐도 내 이야기에 별로 관심도 없고, ‘말이 왜 저리 길어?’하는 분위기였는데, 청와대까지 전달이 됐겠나.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정권 초기에 야당이 불복모드로 들어가 버리면서 출범하고 얼마나 흔들렸는지 생각해보라.”
18대 환노위 활동, 19대 대선 역전 가장 기억나
-원내에서 기억나는 일들은 뭐가 있나. 18대 국회를 포함해서 들려달라.
“18대 국회 때는 환경노동위원회를 했다.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 아니고, 홍준표 당시 원내대표가 가라고해서 갔다. 그런데 환노위가 MB정부의 핵심 어젠다였던 4대강 살리기와 노동개혁을 두고 가장 격렬하게 맞붙었던 현장이다. 당시 여당에겐 인기가 많지 않아서 6개월 있다가 나가거나, 심지어 일주일 만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당시 야당엔 소위 ‘전사’들 뿐이었다.
나는 4년 내내 꼬박 환노위를 지키면서 소위 이쪽의 ‘전사’역할을 했다. 전공은 법학이니 큰 관계는 없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웬만한 자칭 환경운동가, 노동전문가보다 훨씬 많이 안다고 자부할 정도가 됐었다. 나름 역할을 해냈고, 야당이 좌절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진행됐지 않나. 결과도 나 나름은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조 전 의원은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자신의 역할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19대 들어와선 바로 대선이 있었다. 그 때 사실 쉽지 않은 선거였다. 초반에 지고 있을 땐 속수무책이었다. 문재인 후보가 인간적으로야 순수하고, 진정성도 있고 젠틀하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지지자들 중에서도 문재인이 사람도 괜찮고 점잖은데 야당이 된다고 세상이 뒤집어지기야 하겠냐’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 때 내가 친노 이슈를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문 후보가 흐름을 타니까 이해찬, 명계남과 같은 소위 ‘친노주류’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면서 ‘오버’도 하고, 설화도 일으키고 해서 오히려 기회가 왔다. 저 사람들이 또 완장차고 나설 생각하니까 나부터가 안 되겠다 싶은 거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부의 ‘시즌2’고, 친노의 부활이라고 민심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역전을 해낸 거다. 그 과정에서 나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2012년 대선이 임박하면서 박근혜 후보 캠프 대변인은 조해진 안형환 정옥임 조윤선 박선규 이상일 6인으로 가닥이 잡힌다. 이 중 이상일 대변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친이계 출신이다. 이를 놓고 친박 쪽에는 공보를 담당할 인물이 부족했고 이를 친이계가 메꿨다는 얘기가 나왔다. 특히 조해진 등 친이계 대변인들이 캠프에 합류하면서 수세에 몰리던 전세가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 전 의원은 이 점을 강조한 듯싶다.
“그 밖에는 새 정부 출발하자마자 미방위 간사를 하면서 대통령 공약사항이었던 통신비 인하 문제 등을 대표발의, 많은 사람들에게 욕 들어가면서도 창조경제의 기틀을 잡아냈다고 본다. 그 다음에는 유승민 원내대표와 부대표활동 할 때, 국정을 그 중심에서 큰 틀에서 볼 기회가 됐었다. 국회운영, 당정청, 정책협의회 등을 조율하고, 야당과 적대적인 관계를 넘어 대화·소통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협치의 첫 시도였다.”
-그렇게 대통령을 도와줬었는데 공천을 받지 못해 서운했을 듯 싶다.
“사람이 대부분 일이 달성되고 나면 자기가 잘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함정인데 무슨 일이든 잘되면 더 겸손한 마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더 많은 좋은일이 생기고 더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게 된다. 대통령께서 그동안 배신의 정치라고 했던 말씀이, 어느 정도는 맞다. 공천도 주고 유세지원도 해가면서 당선시켰더니, ‘그건 하나의 종속변수고 핵심은 내가 잘해서 됐다’고 하면 대통령 입장에선 괘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똑같이 생각하면 대통령도 그렇지 않나.”
신공항, 백지화가 최악…밀양 안되면 가덕도
신공항 논란은 지난 21일 밀양과 가덕도, TK(대구경북)와 부산의 줄다리기 끝에 백지화되며 김해공항 확장으로 귀결됐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전, 조 전 의원은 지방경제를 위해 백지화 만큼은 피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뷰 당시)신공항 입지 논란이 거세다. 밀양이 지역구였던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어느 쪽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나.
“밀양 주민들의 입장은 8:2 정도로 신공항 찬성이 압도적이다. 나 역시도 밀양이 후보지로서의 적합도는 가덕도보다 낫다고 본다.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변함없이 견지해온 입장이 있는데, 백지화 할 바에는 가덕도로 가야 한다는 거다. MB정부에서 2011년 9월 최종적으로 신공항이 백지화되기 며칠 전 내가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밀양에 오는 것이 좋지만 만에 하나 오지 못해도 백지화는 안 된다고 했다. MB 직계인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와대를 향해 비장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부산시민들을 위한 거라면 당연히 부산에, 밀양시민들을 위한 거라면 당연히 밀양에 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그런 사안 이전에 지방 경제를 살리기 위한 국책사업이다. 이게 무슨 해외여행이나, 비즈니스 출장가기 편하라고 동남권에 허브공항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이제 교통이 좋아서 인천으로도 충분하다. 중요한건 산업이다. 물류비 아끼려고 인천공항 쪽으로 빠지는 기업들 발길을 돌려서 지방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 신공항 사업의 본질이다. 지방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 MB정부 때 경쟁이 과열되는 바람에 대선 앞두고 영남이 분열될까봐,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서 진행을 못했다. 우리 정당의 기반지역이니까. 진짜 이러다 보면 나라가 망하는 거다. 정치적, 지역적 선동과 이해관계에 휩쓸려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신공항은 여전히 밀양에 유치되어야 하지만, 차선책은 백지화가 아니라 가덕도다."
개헌, 대선 전에 결정해야 성공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만든 싱크탱크 ‘새한국의 비전’에 참여하고 있다. 참여 계기와 이 모임의 방향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리 정치권이 선거 때 마다 이기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집권 후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갈지에 대한 계획이나 설계, 컨텐츠 등에서 부족했다. 그래서 지식인, 전문가 등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준비를 하고, 누가 집권을 하든 공유해서 준비된 국정운영을 하게 하자는 취지에 공감했다.”
-정당과 같은 정치세력화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역대 선거 때마다 이합집산이나 크고 작은 정계개편이 있어 왔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고민이나 연구, 대비는 할 수 있을 텐데, 미리부터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정해놓고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싱크탱크의 기본 목적은 차기 정부의 국정과제들을 잘 준비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느 정치집단이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리부터 대놓고 정계개편이나 신당창당을 얘기할 필요는 없다.”
-향후 조 전 의원의 정치행보가 궁금하다.
“일단은 계속해서 지역구 활동을 할 것이다. 또 내년 대선에서 좋은 지도자와 좋은 정부를 세우는 일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개헌론자로서 나라의 큰 틀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고 본다. 20대 국회가 시작되면서 개헌론이 떠오르고 있는데 나는 개헌이 내년 대선전에 결정돼야 한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대선후보들의 공약에 넣어서 차기 정권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동안 대선후보들이 공약을 해놓고는 당선되고 나서는 안 하는 행태가 반복돼왔다.
그래서 후보들 공약에 개헌을 넣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대통령이 결정되기 전에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좀 더 나아가서 아예 후보가 결정되기 전에 해야 한다. 후보가 결정되어 대선 윤곽이 드러나면 여야의 확정된 후보들이 (개헌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내년 상반기에 개헌 작업이 끝나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년 4월 재보선 때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하자고 하는데 괜찮다고 본다. 4월 재보선 때가 아니면 늦어도 6월 안에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개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이후로 넘어가면 현실적으로 개헌이 안 될 걸로 본다.”
-개헌 내용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
“전반적으로 헌법을 큰 틀에서 조금씩 손을 봐야 하는데 권력구조만 놓고 본다면 미국식 4년 중임제인데, 우리나라의 제왕적 대통령제보다는 권한을 축소하되 재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제왕적 권한을 둔 상황에서 연임을 하게 하면 개악이다. 지금 5년도 지겹다고 하는데 8년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4년 중임제 얘기하는 사람 중에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그냥 놔두고서 8년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어떻게 분권인가. 제왕적인 대통령제를 넘어서서 무소불위의 대통령제를 만들자는 건가.
4년 중임제를 하려면 지금의 대통령 권한을 훨씬 줄여야 한다. 감사원을 대통령 직속에서 빼고 국회로 가져간다든가, 대법관·헌법재판관 추천권, 감사위원 추천권 등을 상당히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행정부의 법률 제안권도 폐지해야 한다. 이렇게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대신 잘하면 4년 더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4년 중임제가 되면 정부통령제로 가야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게 아니면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도 괜찮다고 본다. 19대 때 국회에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개헌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새누리당 간사 역할을 했다. 지금은 원외가 됐지만 19대 때 모임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 사무총장이 된 우윤근, 이재오 이런 인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역할을 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정신은 협치
-앞서 차기 대선에서 좋은 지도자가 당선되도록 힘을 쓸 것이라고 했는데 마음에 두고 있는 인물이 있나.
“아직 확실히 자신의 거취를 밝힌 사람이 없기에 누구를 밀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앞으로의 시대정신은 ‘협치’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본다. 그래서 협치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연령으로 볼 때 만 나이로 50대가 좋은 것 같다. 만으로 50대면 우리나이로는 62세까지가 포함될 텐데 이 정도면 적은 나이는 아니다. 이 세대 중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사고가 강한 사람들이 국정운영의 주역이 됐으면 한다. 그런데 그 세대라고 해서 다 생각이 민주적이고 통합적이지는 않다.
독선적이고 독불장군 같은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 암튼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서로 협력해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이 하나지만 내용적으로는 집단통치체제 비슷하게 가야한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 어떤 사람은 원내대표나 당 대표 등을 맡아서 서로 협력하면서 공동책임으로 이 나라를 이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대가 집권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와 함께 극좌도 안 되고 극우도 안 된다. 중도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해야 된다고 본다. 그런 세력들과 세대, 집단이 집권할 수 있는 데 내가 역할을 하고 그 중에서도 누군가 최고 지도자가 되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
-한 때 함께 친이계로 분류됐던 원희룡 제주도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어떻게 생각하나.
“원 지사는 친구고, 남 지사도 좀 서로 대화가 되는 편이다. 남 지사는 경기도지사가 되기 전 국회에 있을 때 틈틈이 만나서 얘기도 하고 했다. 원 지사하고는 빈번하게 통화도 하고 얼굴도 보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승민, 김부겸, 안철수, 오세훈, 남경필, 원희룡 등 이 세대들이 뭔가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가지고 대선에 다 뛰어들어서 국민들에게 참신하고 창의적인 비전을 보여주면서 이 세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진 경쟁, 아주 아름다운 경쟁을 보여주고 그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간에 서로 협력하고 제 역할을 맡아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그림이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출세 아닌 봉사할 사람이 해야”
-본인의 정치적, 경제적 소신을 간단히 요약해 달라.
“서로 당이 다르고 노선이 달라도 함께 의논하고 협력하고 절충하는 게 바른 정치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나라를 책임지고 국민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인식이다. 출세하려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출세하고 정치에는 기본적으로 봉사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해야 된다. 그런 생각으로 들어오면 싸우고 헐뜯을 필요가 없다.
경제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자유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면서도 정말 생존에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계층은 없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 죽거나 병원 못가서 죽는 일은 없도록 최소한의 생활기반은 보장해주고 빈부격차가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은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정치를 하는 목적이다.”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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