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개헌을 수용했다. 18대 국회이래 국회를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있었지만, 언론의 소극적인 태도와 박 대통령의 부정적인 발언으로 ‘주변 어젠다’로 치부됐던 개헌 논의가 정치권의 ‘중심 어젠다’로 급부상한 것이다. 일부 야당에서는 개헌 수용 배경을 문제 삼아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에게 결코 유리한 전략이 아니다. 우병우와 최순실로 대변되는 현 정권의 각종 게이트와는 별도로 야당은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개헌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이 현재의 개헌 주도세력에게 밀려서 개헌을 받아들이기보다 전격적으로 개헌을 수용함으로써 정국 운영을 주도해 나갈 것이라는 것은 예측된 일인데, 다만 그 시기가 내년 초가 아니라 이번 정기국회 연설로 앞당겨졌을 뿐이다. 이제부터 개헌 정국을 누가 더 철저히 준비했는가를 보여줄 시점이다. 개헌은 5단계로 이뤄진다. 개헌 발의와 공고, 국회 표결과 국민투표 그리고 대통령의 공포가 그것이다. 개헌 발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가 할 수 있는데, 이미 청와대는 대통령의 개헌 발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회 발의가 문제되는데, 20대 국회의원 가운데 200여 명이 개헌에 공감하고 있지만 개헌 방향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생각들을 갖고 있어서 그 의견을 조율하는데 상당한 진통과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투표까지 개헌 절차에 필요한 기간을 보면, 발의 후 최소 20일 간의 공고 기간이 필요하고, 공고 후 60일 이내에 국회 표결을 거쳐야 하며, 국회 의결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국민투표에서 확정되면 대통령은 즉시 공포하도록 돼있어서, 최소한 90일 이상이 소요된다. 내년 4월 12일 재보궐 선거에서 역산하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까지 국회 단일 안이 나와야 되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할지 걱정스럽다. 일부에서는 1987년 사례로 유추해 볼 때 내년 6월까지 개헌안이 확정되면 내년 말 19대 대선을 7공화국 헌법에 따라 치를 수 있다고 본다. 어느 경우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충분치 않다. 그런 면에서 야당은 즉각 개헌 정국에 나서주기 바란다.
현재까지 권력구조와 관련해 4년 중임 대통령제, 내각 책임제 그리고 분권형 대통령제 등이 거론돼 왔다. 그러나 국민들은 물론 정치권, 학계에서도 각 권력구조와 우리나라에서 시행중인 중위 수준의 정치제도, 즉 선거제도·정당제도·지방분권화 그리고 정치문화와 연계된 조응성에 대해 깊이 있는 논쟁이 없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각 권력구조가 갖는 장단점을 근거로 집단의 이해를 반영해 논쟁해 온 것이 전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개헌을 수용한 현 시점에서는 언론이 앞장서 우리 정치 현실의 문제점과 각 권력구조의 특성, 현행 중위 수준의 정치제도 간 조응성을 기반으로 깊이 있는 토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 최근 발표되는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의 권력구조 선호도 조사는 아직까지 공론화의 장이 없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제도의 특성과 조응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선호도 조사기 때문이다.
개헌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놓고 청와대와 국회는 벌써부터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후 1987년 9차 헌법 개정이 있기까지 평균 4.3년마다 개헌을 한 셈인데, 4·19 혁명의 결과 실시된 3차 개헌과 6·29 항쟁의 결과 실시된 9차 개헌을 제외하고 모두 정부주도의 개헌이었다. 이제 9차 개헌이후 30년 만에 실시될 10차 개헌은 민의를 반영한 국회주도 개헌으로 가야 할 것이다. 국회는 개헌특위를 조속히 설치하고 특위에 민간참여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헌법 개정을 추진해온 시민 단체들과 연석회의를 통해 민의를 수렴해야 할 것이다. 자칫 헌법 개정이 청와대와 정치권의 타협으로 끝나면 또 다른 정치 불신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국회는 개헌 논의를 국민 수준으로 확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9월 23일 국회에서 시민단체로 출범한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가 10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개헌관련 시민 토론회를 계획하고 있다. 순차적인 전국 국민운동을 통해서 개헌 분위기를 확산시키려는 의지로 보인다. 성공여부를 떠나서 바람직한 시도다. 이와 같은 공론화 과정에서 한국정치의 실체와 문제점이 구체화 되고 일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신뢰를 제고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과 타 시민단체들도 이 같은 국민운동을 펼쳐주기 바란다.
이를 계기로 헌법 개정 논의가 학계와 정계 수준의 논의를 넘어 국민 수준의 논의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
- 정치학 박사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 행정자치부 중앙 자문위원
- 경희 대학교 객원교수
- 고려 대학교 연구교수
- 국민 대학교 정치대학원 겸임교수(현)
-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