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17 목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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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주역들①] 들끓었던 민주화 열망, 뜨거운 6월서 완성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6월 항쟁 도화선 돼
민추협·학생들, 민주화 의식 고취 역할
2017년 06월 17일 (토)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전경이 쏜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지는 故 이한열 열사 ⓒ 시사오늘

“경찰들, 큰일 났어.”

1987년 1월 15일 오전 9시 50분, 신성호 당시 중앙일보 법조담당기자는 이홍규 공안4과장을 만났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 과장과 차나 한 잔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소파에 앉자마자 이 과장은 ‘큰일 났다’는 말부터 꺼냈다. 신 기자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법조담당 6년차였던 그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 기자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경찰들 너무 기세등등했어요.”

공감은 대화의 엔진이 됐다. 신 기자는 이 과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남영동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사망했다’는 문장을 완성했다. 그는 이 사실을 이두석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장에게 보고했다. 이 부장은 기자들에게 추가취재를 지시, 사실 확인을 거친 뒤 윤전기를 세우고 새 기사를 사회면에 추가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학생 운동은 격렬해졌고, 산개돼 있던 재야도 조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결집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2월 7일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이 열렸다. 3월 3일에는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개최됐다.

이에 맞서 전두환 정권이 내놓은 ‘4·13 호헌 조치’는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4·13 호헌 조치를 기점으로, 국민의 뜻은 ‘호헌 철폐’와 ‘민주화 쟁취’로 모아졌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됐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민심(民心)을 이어받은 통일민주당과 재야세력은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했다. 국본은 6월 10일을 D-Day로 잡고 본격적인 국민대회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한열 열사 사망은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이 고스란히 표출된 사건이었고, 결국 이 일이 기폭제가 돼 6월 항쟁의 불꽃은 전국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민주화. 멀게만 느껴졌던 그 단어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6월 항쟁, 과정 아닌 결과

6월 항쟁은 민주화를 이끌어낸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뜨거웠던 1987년 6월’은 허허벌판 위에 세워진 탑이 아니었다. 오히려 6월 항쟁은 정치권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전 국민적으로 확산·분출된 ‘결과물’에 가까웠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으니, 자연스럽게 민주 사회로 이행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한반도를 감싸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9년 12·12 쿠데타로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면서, 대한민국은 다시 독재의 동굴 속으로 진입했다. 

이때부터 정치권과 학생들은 기나긴 민주화 투쟁에 돌입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정계 은퇴를 강요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민우·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출범시켜 사실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어렵사리 풀려난 뒤, 망명지인 미국에서 민주화 투쟁을 지속했다.

학생들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우상호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이인영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임종석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 등은 이 시기 활동했던 대표적 학생운동 리더였다. 물고문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 박종철 열사 역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인물이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민주화 운동은, 1984년 YS와 DJ가 힘을 모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조직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민추협은 대학생들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묶어내는 역할을 했고, 민추협이 모태가 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올라서면서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역치 위로 끌어올렸다. 6월 항쟁은 응축됐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폭발한 무대였던 셈이다. 

6월 항쟁의 의의와 한계

6월 항쟁은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왔다. 6·10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정점을 맞은 6월 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교수는 6월 항쟁을 “민주화와 군부 퇴진, 직선제 쟁취라는 엄청난 성과를 올린 유례없는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또한 시민사회가 직접적으로 권력구조 변화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광우병 위험 부위 수입을 허용하는 한미 쇠고기 협상에 반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2008년 촛불집회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 간 2016년 촛불집회는 6월 항쟁의 성공 경험이 만들어낸 열매였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다만 다시 한 번 군부에 정권을 내줬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요구가 관철된 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됐다. 민주화운동의 양대 산맥이었던 YS와 DJ도 결국 단일화에 실패, 함께 대선에 출마했다가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주는 뼈아픈 실책을 범했다.

다시 한 번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재벌·관료·검찰·정보기관 등 기존 기존의 권력기관들이 더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문제도 발생했다. 5년 후 YS가, 10년 후 DJ가 대권을 손에 넣으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성숙해졌지만, 권력구조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면서 정치는 행정부 중심, 경제는 재벌 중심이라는 구조적 모순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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