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하려면 영어실력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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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하려면 영어실력이 최고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8.04.30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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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부인 박마리아-프란체스카 통역 맡아 권력실세로
최기선 인천시장-YS 민주화 투쟁 외신에 전하며 핵심인사
유재건 의원-유창한 영어실력으로 DJ 핵심실세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추진한 일 가운데 큰 논란을 일으켰던 것은 ‘영어교육’이다. 이경숙 인수위 위원장은 인수위가 출범하자 영어 몰입교육을 시사하는 발언을 해 논쟁거리를 만들었다. 

인수위의 이 같은 발표이후 사설학원들은 영어교육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공교육을 부활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와는 딴판으로 흘러가는 양상이었다. 여론도 좋지 않은 쪽으로 악화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인수위는 영어몰입교육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영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돼 버렸다. 진짜로 영어를 잘해 벼락출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주 기본이다. 필자는 최근 필리핀 관광청 한국사무소장을 맡고 있는 ‘마리콘 에브론(Maricon Ebron)’을 만난 적이 있다.

필자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마리콘과 직접 영어로 인터뷰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때문에 당시 만남을 주선했던 ‘그레이프 피알(필리핀 관광청 홍보업체)’의 이보래 과장이 통역을 맡았다. 이 과장의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마리콘과의 인터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과장의 유창한 영어실력에 탄복해 “너무 영어를 잘한다.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인센티브’를 받느냐”고 물었다.

이 과장은 이에 “무슨 인센티브냐, 우리 회사에서 이정도 영어는 누구나 다한다. 영어를 못하면 취직이 됐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과장의 말처럼 지금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불과 50년에서 100년 전만 하더라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 출세가 보장되기도 했다.

영어하나로 외부대신 오른 이하영

영어를 잘해 출세가도를 달린 첫 번째 한국인은 ‘이하영’이다. 영어실력 하나로 ‘이하영’은 구한말인 대한제국 시기 미국공사와 일본공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역임할 수 있었다.

 
이하영은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인 1858년 경상도 동래군 기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이 매우 구차해 동생과 함께 찹쌀떡 행상을 다녔다. 한마디로 동네의 구차하고 한미한 촌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하영은 당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오던 미국인 의사 알렌과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돼 그의 요리사가 됐다. 그는 알렌의 요리사가 돼 ‘영어’를 익힐 수 있었다.

이 후 조미수호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은 미국공사를 파견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은 없었다. 때문에 이하영은 미국공사관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미국공사를 거쳐 외부대신에 올랐다.

촌부로 태어나 미국인 의사와 인연을 맺어 요리사로 들어가 벼락출세를 한 이하영은 어마어마한 부(富)도 축적했다. 그는 서대문 합동에 99칸짜리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의 집은 큰 한옥 외에 양옥이 따로 있었고 사랑채와 행랑채가 딸려 있었다. 행랑채엔 수십 가구의 하인이 살았다. 대지 1500평에 달하는 집안엔 조그마한 인공 동산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기붕 박마리아 영어로 권력실세
 
자유당 시절 영어를 잘해 출세가도를 달린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붕’이다.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오르면서 ‘이기붕’은 정식 비서실장이 됐다.

물론 ‘이기붕’이 영어를 잘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그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였다. ‘박마리아’는 미국 유학을 통해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은 누구나 알다시피 미국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때문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국내 돌아가는 정세를 잘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를 해결해준 인물이 바로 ‘이기붕’의 아내였던 ‘박마리아’였다. ‘박마리아’는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에서 ‘이기붕’이 비서실장이 되자 프란체스카 여사와 안면을 튼 후, 여사의 개인비서 역할을 했다. ‘박마리아’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세상 소식을 전하거나 정세를 알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이 대통령의 정치구상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박마리아’에게 전달됐고, ‘박마리아’의 생각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이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힘은 당연히 ‘이기붕’과 그의 아내였던 ‘박마리아’에게 쏠렸다. 각 종 이권이나 청탁은 ‘이기붕’과 ‘박마리아’를 통하면 무조건 ‘OK’였다. 세간에서는 “박마리아를 통하면 안되는 게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만큼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자유당시절 권력서열로 치면 2인자였다.

이들의 ‘파워’가 얼마만큼 대단했는지는 당시 풍문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자유당 정권에서는 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한다. 하나는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 다른 하나는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기거하는 서대문이다.”

이처럼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몇 안되던 시절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출세의 큰 발판이었다.

자유당 정부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한국정치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상도동과 동교동에서도 영어를 잘해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 있다.
 
YS와DJ의 통역관은 최기선과 유재건
 
최기선은 YS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신념을 외신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상도동에서 능통한 영어실력을 인정받은 인물은 다름 아닌 최기선이다. ‘최기선’은 지난 80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린 격변의 시기 김영삼(YS)의 상도동 사단에 입문했다.

‘최기선’은 고(故) 김동영 최형우 서석재 김덕룡 등에 비하면 늦은 시기에 상도동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상도동 사람들에 비해 초고속으로 출세(?)를 했다. 88년 통일민주당으로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뒤 YS가 대통령에 오르자 93년 인천시장에 임명됐다. 이후 민선 인천시장으로 당선됐다.

이처럼 ‘최기선’은 YS으로부터 중용됐다. 그가 신임을 받은 이유는 다름 아닌 ‘영어실력’때문이었다.

‘최기선’은 유창한 영어실력을 기반으로 당시 YS의 민주화 투쟁소식을 외신에 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그는 문민정부시절 핵심 실세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필자는 96년 최기선 당시 인천시장과 만난 적이 있다. 이때 필자는 최 시장에게 “영어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YS가 외국 인사들과 만날 때면 늘 최 시장을 찾았다는 얘기가 있다”고 물었다.

최 시장은 이에 대해 크게 웃으며 “외신담당을 맡아 YS의 민주화 투쟁소식을 외신에 전하는 역할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영어실력이 좋지 않다. 나도 외국인과 만나면 통역관이 필요할 정도다”고 말했다.

사실 ‘최기선’이 상도동에 입문하기까지 여러 고충이 따랐다. ‘최기선’이 상도동행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그의 부인이었던 고(故) 최영숙씨 때문이었다. 최영숙씨는 YS의 개인사무실인 ‘한국문제 연구소’에 들어가 오랜 기간 비서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상도동 식구들과는 한 식구처럼 지냈다.

‘최기선’이 자신의 부인이었던 최영숙씨를 만나게 된 인연은 민주당 이협 전 의원 때문이었다.

75년 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신민당을 출입했던 이협은 최영숙씨를 자신의 친구인 최기선에 소개했다. 이런 인연으로 둘은 결혼하게 됐다.

79년 이협이 김대중(DJ)의 동교동에 공보비서로 들어가자. 최기선도 동교동 캠프 합류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인의 강력한 권고로 최기선은 YS 캠프로 합류하게 된 것.

동교동 사단에서 영어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유재건 의원이다. 유 의원은 연세대를 졸업한 후 미국에 건너가 법학 공부를 한 뒤 변호사가 됐다. 83년 미국으로 망명한 DJ와 인연을 맺은 게 동교동에 합류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95년 DJ가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유 의원은 부총재를 맡아 서울 성북갑에 출마, 이철 의원을 꺾고 당선됐다.

DJ는 당시 각종 토론회나 연설회에서 외국인들이 영어로 질문하면 “어의 유 의원 찾아봐”를 연발하며 통역을 부탁하곤 했다. 그만큼 유 의원은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동교동의 핵심인사로 자리잡아갔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인수위는 영어교육을 강화시키기 위해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한다고 했다고 전면 백지화시켜 버렸다. 백지화 이면에는 영어교육 열풍이 밀어닥칠 것을 우려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국민들은 이제 알아야 할 게 ‘영어’를 잘한다는 것만으로 실력을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건 기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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