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종이 블랙리스트와 현상적 블랙리스트
스크롤 이동 상태바
[칼럼] 종이 블랙리스트와 현상적 블랙리스트
  •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
  • 승인 2018.01.24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상호의 시사보기>권력 집중되면 ‘블랙리스트’ 반복될 수밖에 없어…분권 개헌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

1월 23일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문화 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을 작성하고 집행하도록 지시한 김기춘(78세)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2심 법원은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고위 공직자들도 실형을 선고 받았다. 동 법원은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 블랙리스트와 관련하여 추가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공범관계로 판단했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전직 대통령까지 기소되었지만, 지난 헌정사를 살펴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는 물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진보·보수를 떠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친정부 인사들은 중용되었고, 반정부 인사들은 불이익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뀌면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예술 분야까지 공직은 물론 사기업까지 사회 전 분야에서 주류세력이 교체되었다. 종이 블랙리스트건 심중 블랙리스트건 모든 정권에서 여러 형태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한 셈이다.

김기춘 비서실장과 고위 공직자들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이유로 구속되는 것을 보고, 문재인 정권은 친정부·반정부를 가리지 않고 국가적 차원에서 탕평 인사를 실시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8개월 동안의 인사를 보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 정권 역시 적과 동지를 철저히 구분하고, 공직은 물론 공기업 산하 임직원까지 직·간접적인 압박으로 솎아내고 있다. 그런데 역대 정권들의 경험에서 입증된 것이 있다. 권력의 독주는 끝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계에서 벌어지는 전 정권 부역세력 추출작전은 종이 블랙리스트는 없다 할지라도 심중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MBC 사태를 보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같은 혐의로 기소되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면 MBC 신임 사장 최승호는 취임 후 특정 아나운서를 바로 프로그램에서 배제시켰고,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 사장이 ‘김○○ 아나운서가 훌륭하지만 이제 안 쓸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이처럼 우리사회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종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자들은 처벌받고 현상적 불랙리스트를 집행하는 자들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인가. 더욱이 MBC 최 사장의 행태는 ‘받은 대로 주리라, 너도 우리가 당한 대로 당해보라’는 식의 보복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권이 내세우는 적폐청산 구호를 부끄럽게 만든다. 전쟁이나 혁명기가 아니라면, CEO의 덕목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통합을 지향하고 반대편 소수를 끌어안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높이 평가 받는 이유다.

그런데 큰 권력이나 작은 권력이나 권력을 잡게 되면 너무도 쉽게 오만해 지고 진영논리에 갇혀 독선에 빠진다. 취임식을 할 때는 겸허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심을 잃는다. 본인의 성향 탓도 있지만 제도와 주변 사람들이 그를 오만하게 만든다.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전직 정치인의 말이 생각난다. 동료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당내 후보 경선에 나설 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맞담배를 피며 허물없이 담소를 했는데,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에는 맞담배를 피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격의 없던 본인도 대통령 앞에서 맞담배를 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될 때 권력현상은 독점과 배제로 나타나지만, 권력이 세력 간 공유될 때 권력현상은 타협을 주도하는 리더십과 협치로 나타난다. 권력이 분권을 통해서 공유되어야 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를 통해 집권하거나 CEO에 취임한다는 것은 권력을 주도한다는 의미이지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이 아니다.

블랙리스트란 권력의 독점과 배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승자독식의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자주 나타난다. 소수를 배려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로 분권과 협치가 이루어질 때, 종이 블랙리스트는 물론 현상적 블랙리스트도 점차 사라지고 상생과 책임정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개헌과정에서 합의제 민주주의에 적합한 정치제도와 권력구조에서 분권형 정부제를 채택해야하는 이유다. 

 

- 정치학 박사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 행정자치부 중앙 자문위원
- 경희 대학교 객원교수
- 고려 대학교 연구교수
- 국민 대학교 정치대학원 겸임교수(현)
-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현)
-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