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책임 점점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껴…깊이 고민하겠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한 줄기 빛을 찾아 캄캄한 동굴 속을 헤매고 있지만, 어둠이 사라질 기미조차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失政)이 촉발한 ‘보수 몰락’은, 정권이 바뀐 지 9개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2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조사해 21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19.0%로 더불어민주당(50.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도보수를 표방하는 바른미래당(7.4%)의 지지율 역시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제18대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현 상황이 개선될 여지도 크지 않다. 한국당은 홍준표 대표 취임 이후 문재인 정부에 각을 세우면서 보수 결집에 ‘올인’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바른정당은 아예 보수 적자(嫡子) 경쟁을 포기하고 국민의당과 합당, ‘영·호남 통합 정당’이라는 정치 실험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보수가 복원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이제 조금씩 부서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왜 보수 복원에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 2월 17일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서울 미래세대 리포트’를 보면, 서울시민 중 진보는 38.2%, 보수는 32.1%, 중도는 29.7%였다. 여전히 최소 40%는 스스로를 보수 혹은 중도보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보수정당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인물난(人物難)’과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보수가 파산했다”
제20대 총선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는 공통점이 있다. 보수의 거물(巨物)들이 직·간접적으로 타격을 입은 사건이라는 점이다. 우선 제20대 총선에서는 김무성 의원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이 상처를 입었다.
한때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 1위를 질주하던 김 의원은 총선 참패 이후 지지율이 폭락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이후 바른정당 창당과 한국당 복당을 반복하며 ‘의리를 지키는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도 희석된 상태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꿨던 오 전 시장도 총선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패퇴하며 경쟁력에 의심을 받고 있다. 김 전 경기지사 역시 비난을 무릅쓰며 고향 대구에 출마했지만, 낙선 후 존재감이 사라졌다.
탄핵 정국에서는 박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서청원·최경환 의원이 무너졌으며, 대선 잠룡(潛龍)으로까지 거론되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도 힘을 잃었다. 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바 있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도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보수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거물급 인사(人士)들이 지난 2년 동안 줄줄이 주류에서 이탈해버린 셈이다.
‘고난의 2년’을 통과하는 동안, 상처 없이 여전히 보수의 대권 후보로 머물러 있는 인물은 광역단체장으로 나가 있던 홍준표 한국당 대표, 남경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정도다. 여기에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정도가 추가로 거론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약점이 존재한다. 홍 대표의 경우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수구(守舊)적 색채가 덧씌워졌다. 비하발언·성차별적 언행 등 각종 ‘막말’도 불안요소다. ‘개혁 보수’ 대표격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던 남 지사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바른정당 탈당·한국당 복당을 감행하면서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유 대표와 안 전 대표는 ‘정체성’ 논란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애당초 안 전 대표는 중도진보를 외치며 정치권에 발을 들인 인물인 까닭에, 유 대표와 안 전 대표가 ‘보수의 대안’으로 부상(浮上)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22일 <시사오늘>과 만난 경기 지역의 한 한국당 당협위원장은 “영남 호남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이 다른 두 세력이 만난 것이 진짜 문제”라며 “유 대표도 안 전 대표도 스스로를 어떤 세력의 대표로 지칭해야 할지 고민일 것”이라고 했다.
“원희룡을 주목하라”
자연히 원희룡 제주지사에게로 시선이 쏠린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총선·탄핵 폭풍에서 벗어나 있던 원 지사는 정통보수와 중도보수를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꼽힌다. 중앙정치권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총선과 탄핵을 거치며 크고 작은 타격을 입은 지금, 원 지사는 보수 재건의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물론 원 지사에게도 한계는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남경필 경기지사 등이 이슈를 만드는 동안, 원 지사는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 있었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23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원 지사는 보수 주자로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 실패했다”면서 “당장 보수의 대안으로 떠오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만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손상은 없었다는 점에서, 향후 행보에 따라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평가다.
도정(道政)에 집중하던 원 지사도 ‘몸 풀기’에 나서는 분위기다. 원 지사는 21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이라고 보나’라는 질문에 “이대로는 안 된다”며 “책임이 점점 무거워지고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시간을 두고 깊이 고민을 하겠다”고 말했다.
또 “내 눈은 총선보다는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 대권에 도전하든지, 아니면 그 정도의 의미 있는 과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며 “지금은 도지사기 때문에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야권의 대안 주자로 나설 수 있는 준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궤멸 직전에 놓인 보수의 복원을 위해 전면에 등장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6·13 지방선거에서 제주지사 선거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원 지사의 재선(再選) 여부에 따라, 보수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지사가 제주지사 선거에서 패한다면, 보수는 지지층 복원을 위한 주춧돌을 잃게 된다. 반면 ‘개혁 보수’를 외치는 원 지사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제주도는 보수 재건의 시발점(始發點)으로 떠오르게 된다. 보수의 운명이 제주에 스며들고 있다.
* 본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