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제목은 아주 특이하게 '주홍발 무덤새'라고 해서 말랑말랑하고 자연친화적이어서 관심을 유발할 만하다. 그런데 아주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정도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환경이라는 주제의 이야기인데 좀 지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음악을 이야기 하려면 한번쯤 이런 골치 아픈 것도 생각해 봐야 할 듯도 해서 주제넘게 한번 나서보는 것이다. 아울러 이 분야의 대가들께서는 어여삐 봐주시기를 필자는 먼저 고개 숙여 부탁드린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딱딱한 내용은 잠을 청하는데 아주 좋다. 딱딱한 글을 싫어할 경우 이 부분은 뒀다가 나중에 불면증 때문에 고생하는 날 읽으면 된다. 그러면 숙면을 취하는데 더없이 좋을 것이다.
세계 인구의 증가와 과도한 개발, 그리고 자연자원의 남용은 지구 생태계의 자정과 자연치유 능력을 상실하게 했다. 이로 인해 환경오염과 더 나아가 자연 질서의 파괴를 초래해 인류를 포함하는 자연생태계 구성원의 생존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와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벌써 도시화 비율이 90%를 넘었고, 중국도 2015년 기준 도시화 비율이 50%를 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도시는 스모그에 신음하고 있고, 2014년에는 APEC 정상회담을 위해서 스모그를 없애려고 며칠 동안 휴일을 정할 정도였다. 이제 2018년 오늘 중국의 엄청난 공해의 여파는 우리나라까지 엄청난 미치고 있다. 앞으로 중국의 도시화가 90%에 육박한다고 치면 그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도시화, 산업화, 국제교역의 확대를 주축으로 하는 인류 경제활동의 증가는 지구온난화, 수자원의 고갈, 적조발생, 열대삼림 파괴, 사막의 가속화, 생물 종의 감소 등 지구생태계 차원의 총체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환경 문제에 대한 생각은 이와 같은 국지적 또는 전 지구적 오염행위, 그로 인한 제반 문제들을 포괄하는 철학으로 접근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환경 위기를 초래하는 철학적, 사상적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고 아울러 그 대안으로 나오고 있는 몇몇 환경 철학의 의미를 심도 있게 짚어보면서 본질적 진위를 밝히는 노력도 포함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환경과 인간이라는 부분에서 철학적인 성찰을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근본적으로 따져 묻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 인간은 존엄성으로 존재하는가?
* 인간의 역사는 개체로서 발전하는가?
* 인간은 개체이지만 자연을 포함하는 전체로서 존재하는가?
* 존엄성을 갖는 인간과, 자연에 포함되는 인간 가운데 본질적인 가치는 어디다 둬야 하는가?
아무튼 던져지는 화두가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질문에 성급히 답변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는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찾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오늘날의 환경파괴와 다양한 생물 종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일으킨 현대 산업문명의 사상적 저류는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지배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물질적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중심주의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으로 이끌었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 도전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사상을 지니게 된 것이 문제인 셈이다. 아울러 물질적 진보는 자본주의적 팽창이 빚어낸 산물로서 현실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상과 현실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많은 것 가운데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데카르트는 '나' '자신' 이라는 인간 중심주의적 철학을 지향했고, 헤겔 , 마르크스, 엥겔스는 변증법,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발전사상 전개했다. 토인비는 자연에의 도전과 응전에서 인간의 역사가 발전한다는 고찰을 했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기독교 사상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사회에 가장 적절한 종교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논리로부터 나온 것들은 곧 '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 '시장 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 조차 적용된다', '국가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을 경제성장으로 가늠한다', '과학은 인간을 위해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등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지금까지 사상이나 현실에 있어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규정하고, 그 존엄성과 노동의 신성함을 무기로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와 '자연 지배적 세계관' 사상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현실로서 개체화 되어왔다. 이로 인해 급기야 오늘날에는 환경 위기, 생태 위기라는 절박한 국면을 자초했다.
이러한 문제점이 대한 대책으로 환경철학적 접근에 있어서는 2가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하나는 '표면적 운동'(shallow movement)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심층생태'(deep ecology) 철학이다. 표면적 운동 철학은 현존의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깔고 있는 철학적 전제나 근본적 진리에 대해 도전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난 환경문제에만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경우, 오염 및 자원고갈 문제에만 집착해 건강이나 풍요로움에 관심을 두는 미국이나 서유럽 등 선진국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관점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즉, 단기적인 인간중심주의적 개량주의 접근법이다.
때문에 이러한 철학을 토대로 하는 가시적인 것으로는
* 관련법령의 제정
* 공공정책의 수립
* 환경교육 강화
* 환경 관련 세법의 제정
* 자원 절약
* 후손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줘야 한다는 투의 미래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 강조 등으로 나타난다.
심층생태 철학은 이와 반대로
*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인 지구 생명의 번성에 본래적 가치를 둔다.
* 생명 형태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내재적 가치이며, 지구에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 번 성에 기여한다.
* 인간은 모든 생명형태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훼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 현재 인간은 인간 이외의 세계에 간섭하는 것이 지나치며, 그 결과 상황은 빠르게 악화 되어간다.
* 이데올로기는 생명 평등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 인구 감소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등등의 철학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중심 주의적 철학, 지배적 세계관 등과의 완전한 단절을 시도하고 있음과 아울러 환경파괴의 철학적 근원이 되고 있는 전통적 종교나 철학의 근본적 변화까지 모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독립해서 그것을 지배하거나 통제하거나 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장황하게 재미없고 딱딱한 글을 쓴 것은 예전 언젠가 공부 차원에서 쓴 글의 일부이다. 아마도 많은 자료를 놓고 짜깁기도 하고 직접 쓰기도 하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각 부분마다 원전이 어디인지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여기에 원전에 대해서 주석을 달아놓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내용이 특별히 대단한 내용이 아닌 보편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내는가에 대해서 이제 곧 설명할 셈이다.
대략 일 년 전쯤 재미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통섭을 주장하는 생물학자인 최 재천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물론 비교적 오래된 기사라서 인터넷으로 조선일보 자료 검색을 해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너무 오래되서 그렇다. wording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골격은 이렇다. 조금 틀리더라도 최교수께서 혜량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인간들은 지금 환경오염이 심각하네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끔찍하게나 지구를 위하고 있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 그들이 오래 살고 싶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지구는 지구이다. 몇 십 억년의 나이의 지구는 인간이 환경을 모두 망가뜨리고 멸종하면 대략 100년 정도면 다시 자생적으로 회복을 할 것이다. 인간은 지구를 걱정하는 듯 하지마라."
대략 이런 취지의 기고문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환경을 위한 표면적 운동 철학, 심층 생태 철학은 모두 이른바 인간의 '자기 잘난 소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최교수가 환경을 망가뜨려도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당시 통찰력이 뛰어난 생물학자의 바로 이 글을 읽고 마치 해머로 머리를 맞은 듯 했다. 바보가 도 트였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가 사실 이렇게 환경을 망가뜨리기 전의 삶은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아마존의 원주민, 남태평양의 작은 섬의 원주민처럼 때 묻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음악 중에 이렇게 가장 원시적인 음악이 하나 있다. 호주 외딴섬의 맹인 가수인데 그는 언어와 가사, 그리고 노래 자체가 원시 그 자체이다.
필자는 그 곡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의 노래를 들으며 가사들과 연관해서 몇 줄 써놓은 시처럼 짧고 약간은 응축적인 글이 있어서 그것으로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글도 원시적인 느낌을 담고 싶었는데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홍발 무덤새 부르는 맹인 따라
천둥과 무지개와 깃발을 만난다
그는 저녁노을 슬퍼하며 울고 있다
그의 색깔들이 오후의 하늘을 가로 지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 울면
주홍발 무덤새가 울고
여인이 울고
노인이 울고
어머니가 신성한 봄을 위해 운다
무지개와 함께 하는 곳에서 태어난 무지개 아이
해 저물녘 아버지 생각으로 슬픔에 잠긴다
사람 모습 닮은 구름들
끝없이 바다에 떠 오른다
먹구름이여
그대는 왜 흩어지고 또 모이는가
북쪽에서 오는 바람 부드러운 팔로 어루만진다
돛대에는 바람이 잘게 찢어놓은 깃발들
찢어진 깃발들이 슬픈 춤을 춘다
천둥은 비단구렁이의 영혼
주홍발 무덤새가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