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인권국제영화제 공동위원장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198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 꽃피운 리얼리즘 거장
“조부모님 고향 이북 산천은 꼭 가고픈 노스탤지어”
“리얼리즘 영화 기법 다루듯 北 사실주의 접근 필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인생은 아이러니다. 예술도 그렇다.
영화 <별들의 고향>(1974)은 뭣도 모르고 덤볐는데 대박이 났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사실주의 영화를 살려보겠다는 패기로 뛰어들었다. 한국영화 리얼리즘 부활의 서막을 열었다. <바보선언>은 거나하게 망쳐놓고, 영화판을 떠날 작심으로 만들었다. 근데 또 잘 됐다. 1980년대 영화의 르네상스를 연 리얼리즘 거장, 이장호(74)감독 얘기다. 세편의 영화 모두가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작 100편 중 톱 텐에 들어있다. 한 편도 아니고 세 편이 열손가락 안에 든 건 이 감독이 유일하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공포의 외인구단>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이다.
현재 그는 ‘북한인권국제영화제’를 매해 열고 있다. 영화의 리얼리즘 가치에 주목하듯 북한사회도 사실주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감독의 지론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조부모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 바닷가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들은, 귓가를 울린 추억담 때문인지 가보지도 못한 이북산천에 대한 꿈을 꾸며 자랐다.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로, 애틋한 공간, 민족애가 싹텄다. 근데 그런 곳이 아프다. 2011년 피골이 상접한 북한의 소녀를 보고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사상 최초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개최 전전날 감독은 다른 건 모르겠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주민들이 숨통이 트였으면 좋겠다”…. 인터뷰는 기독교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25일 이대 필름홀에서 가졌다.
- 신성일·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을 대히트시키며 80년대 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별들의 고향>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원작소설을 쓴 최인호와 친구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를 같이 다녔다. 이 친구가 고등학교 때 신춘문예에 등단했고, 젊은 나이로는 보기 드물게 대가들이 쓰는 신문소설에 연재를 했다. 그게 <별들의 고향>으로 장안의 화제였다. 샐러리맨들이 출근을 하면 ‘야, 어제 경아 어떻게 됐어?’ 물어볼 정도로 등장인물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슈퍼베스트셀러가 돼버렸다. 자연스레 친구인 내가 영화를 맡게 됐고 아주 쉽게 데뷔를 했다. 아마추어처럼 만들었는데 그게 또 신선했는지 대히트를 쳤다.
담부턴 영화 만드는 게 좀 뭐라고 그럴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오만했는데 만약 그대로 나갔으면 아마 자연도태 됐을 거다. 근데 또 하나의 행운이 뭐냐면 대마초 파동으로 비롯됐다. 송창식·이장희·윤형주 등 당시 쎄씨봉 가수들이 전부 걸려 활동을 못할 무렵 나도 걸려 무기한 정지를 받았다. 갑자기 할 일도 없어지니까 한국영화 시사회 같은 것을 많이 보러갔고, 내가 만든 것과 달리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보게 됐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한국영화는 현실을 전혀 그리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당시가 75, 76년이었는데, 내가 만든 영화도 그랬지만, 한국영화에서 서민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 거였다.”
- 예를 든다면?
“원래 한국영화에는 <박서방> <마부>라든지, 굉장히 사실주의적 영화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정치를 하면서 북한을 의식해서인지, 선전용으로 변질 된 듯했다. 당시엔 한국이 북한보다 가난하게 살았다. 남한은 이처럼 못산다, 정치도 엉망이고, 부정부패, 비리 이런 것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면 안 되니, 사실적인 것을 회피하고, 태반이 거짓말로 그려진 거다. 예컨대 우리가 명작이라고 꼽는 <하녀>라는 영화를 보면 방직공장 직공들이 피아노레슨을 받고 막 택시타고 다니고 고급스런 생활을 한다.
‘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 언젠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리얼리즘부터 부활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대마초 사건이 끝나고 1980년에 만든 게 안성기 주연의 <바람불어좋은날>이다. 원작은 최일남 작가의 <우리들의 넝쿨>인데 새로운 바람이 분다, 뭐 그런 걸로 해서 붙인 제목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도시개발이 막 일어나는 모습 속에서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아이들이 겪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게 굉장한 효과를 봤다.|
당시까지 영화는 상투적으로 말하면 나처럼 준비 안 된 사람들이 영화판에 들어와서 어쩌고저쩌고 해서 감독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실험 정신으로 만든 <바람 불어 좋은날>을 보고나서 젊은 엘리트들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날 찾아왔다. 서울대 학생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일종의 리얼리즘을 시작했다. 내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다 영화를 만든 이들이 장선우, 배창호다. 이런 식으로 퍼져나갔다. 현실고발도 하고 전부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1980년대 리얼리즘이 완전히 부활되면서 여균동이라는 감독이 <세상 밖으로>라는 영화를 들고 나왔다. 영화는 리얼리즘을 한 술 더 떠서 욕설을 처음으로 등장시켰다. 쌍욕도 나오고 충격이었다. 이게 대중들한테 너무 강한 인상을 줘서 흥행요소가 됐다. 그다음부턴 한국영화가 손님을 끌기 위한 방편으로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무조건 욕설이 들어간다. 정말 목사님 빼놓곤 다 쌍욕을 하는 영화가 됐다. 이런 시기를 지나, 한국영화가 손님이 자꾸 많아지니까 19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기업들이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아마추어로 성공”
-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은 뭔가.
“나는 늘 ‘다음 작품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또 말해왔다. 이상하게, 내가 돈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는 다 실패했다. 그간 보면,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는데, 관객들은 성공한 영화만 기억하고 실패한 영화는 모른다. 이번엔 흥행이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다 실패했다. 영화사를 차리고 만든 영화는 다 실패했다고 보면 된다.
아이러니한 게, 오히려 포기하고 일부러 영화판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잘 됐다. 영화정책이 하도 나를 못살게 구니까 작심하고 하나 망치고 떠나야지 해서 만든 게 1983년 제작한 김명곤, 이보희 주연의 <바보선언>이었다. 사전검열이 심할 때라 어떻게든 엉터리로 시나리오 하나 골라잡아 허가부터 받고, 일부러 영화를 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망쳐지지가 않고 오히려 영화가 독특한 영화, 실험영화가 돼서 그건 그것대로 대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히트를 쳤다.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국영화100주년 역사를 기념할만한 영화 100편을 뽑았는데, 당시 내 영화가 네 편 들어갔다. 그 중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이 베스트 탑 텐에 들어갔다. 나머지 100 위안에 들어간 작품은 1987에 만든 이보희, 김명곤 주연의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이다. 손에 꼽힌 작품들 모두 뭣도 모르고 할 수 없이 만들어 내거나, 포기하고 만든 것들이다. 아마추어리즘이나 즉흥성, 이런 것들이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게 됐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나를 존경할 수가 없다. 스스로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끝내 나는 아마추어로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리얼리즘의 초석을 닦은 거장이다. 너무 겸손의 말은 아닌지.
“겸손해서가 아니고 정직한 거다. 지금은 프로페셔널 시대다. 나하고는 맞지 않다. 프로페셔널 시대는 자본에 의해서, 자본의 감시 속에서 영화를 만들고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월급쟁이 한 번 해본 적도 없이, 영화를 만들어왔고, 절제된 계획 속에서 영화를 만들지를 못한다. 큰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 때는 체계적인 것이 필요한데 내겐 그게 없는 거다. 이제는 방법이 없으니 내 전공분야인 일부러라도 아마추어 길을 찾아가야 된다고 본다.
상업영화가 고조에 달하면 언제든지 돌파구는 독립영화에서 나타난다. 프랑스가 미국 영화를 흉내 내 막 자본에 의해 영화를 만들 무렵, 젊은 영화평론가들이 반발하며 직접 카메라 들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게 ‘누벨바그’란 영화다. 이탈리아의 경우도 파시스트 무솔리니 정권이 영화를 화려하게 만들려고 하자 이에 대응해 나온 것이 이른바 ‘네오리얼리즘’이다. 미국의 경우도 할리우드가 <클레오파트라>, <시저> 등 큰 영화를 만들면서 결국 도산됐을 당시, 미국 영화의 명맥을 다시 이어받은 게 뉴욕에서 촬영을 시작한 ‘뉴아메리칸 시네마’였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돈이 영화를 만들어낸다. CJ나 롯데나 작가나 관객을 위한 영화가 아니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영화가 나오니까, 욕구불만이 한쪽에 쌓이고 있다. 이것이 완전히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돌파구는 역시 독립영화에서 나올 거로 본다. 난 그걸 희망하고 있다.”
“상업영화 고조 달하면, 돌파구는 독립영화”
- 안성기, 이보희, 김명곤 등과 주로 함께 해왔다. 어떻게 인연이 됐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찍을 때였는데 원작을 보면 주인공 눈이 사팔 눈이다. 나는 사실적으로 만들려고, 실제로 신문에 사팔눈을 가진 이를 찾는다고 공고를 냈다. 전국에서부터 원서가 몰려왔고, 개중 한 명을 뽑아, 집에다 숙식시키면서 지도를 했다. 그런데 연기가 안 되는 거다. 배창호가 보다보다 답답하니까 이러면 안 되겠다, 직업배우를 쓰는 게 낫지 않겠냐 해서 찾아낸 게 안성기다. 우연히 편집실에서 만났는데 연기가 너무 좋아 함께 하게 됐다.
김명곤은 연극을 보러갔는데 연기가 좋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토속적인 연기 정서가 있다고 여겨져 <바보선언>부터 쭉 함께했다. 이보희는 <어우동>을 만들 때 김보연이란 배우의 추천으로 만났다. 사극에 잘 맞는 사람 있으니 만나보자 해 봤더니 한복도 잘 어울려 발탁하게 됐다. 나는 한 번 연을 맺으면 그 배우와 계속 같이 일할 수밖에 없다. 나한테 훈련받은 배우들은 도화지 같아서 내가 추구하는 것을 잘 구현해준다.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 후배 감독들 중 좋아하는 감독은.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든 감독은 봉준호 감독이다. <괴물>을 보면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기법은 상당히 사실주의적이고 인문적으로 견고해서 좋다. 후배들 영화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친하게 지내는 후배는 이무영 감독이라고, 대한민국의 좋은 시나리오를 많이 썼다. 영화도 잘 만드는데, 이상하게 운이 안 따라줘 흥행이 안 됐다. 뜻밖에 발견한 감독은 봉만대 감독이라고, <덫>이란 영화를 보면서 놀랐다. 포르노나 애로 감독인줄 알았는데 이 친구 잘 만드는구나, 훌륭하단 생각을 갖게 됐다. 사실상 영화 잘 만드는 감독들은 정말 많다.”
- 故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이끈 ‘신필름’ 영화사 출신이다. 당시를 추억한다면.
“한 사람은 감독이고 한 사람은 여배우고 이상적인 부부다. 두 사람의 힘으로 ‘신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면서 한국영화의 부흥기라고 할까, 한국영화가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충무로가 50여개의 군소 프로덕션의 집합체라면, 신필름은 단독회사로 엄청난 기업이었다. 전속감독, 전속배우, 스텝들 등 직원이 200명이나 됐었다. 한국영화가 일 년에 100편 만들어진다면, 충무로에서 60편, 신필름에서 40편을 만들어낼 정도로 컸다. 신필름 사람들은 대우를 못 받아도 신필름 사람이라는, 자기 긍지가 있었다.
신 감독님과 최은희 선생님은 신필름에서 양대산맥이었다. 신 감독님은 왕이면서 아버지 역할을 했고, 최은희 씨는 여왕이면서 어머니 역할을 했다. 최은희씨는 지금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런데 한국영화계에서는 독보적인 둘도 없는 톱스타였다. 우리 때는 슈퍼스타였고 김지미 씨와 쌍벽을 이뤘다. 연기파이면서 정서적으로 한국적인 자연스런 미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에 북한에 납치되면서 두 분 다 지금 젊은 세대들한테 잊힌 영화인이 됐다. 납치되신 이후 박정희 정권 때 신필름을 등록 취소시켰고, 강제로 영화 활동을 못하게 만들었다.”
“작품 대하는 태도가 인격이고, 자격”
- ‘영화감독은 인격’이라는 신상옥 감독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이유는.
“65년에 처음 신필름에 들어왔을 때다. 아버지가 해방 후미군정 문광부 공보처의 영화 검열관이셨다. 신 감독님하고 아버지와 친분이 생겨 조연출로 일하게 됐다. 당시 영화를 배워 들어온 게 아니고, 너무 모를 때라 신상옥 감독님의 대담집부터 읽게 됐다. 책에서 감독님은 영화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인격이라고 했다. 감독에게 중요한 게 인격이라니, 무슨 뜻인줄도 모르고 백짓장에 먹물하나 딱 떨어진 것처럼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상투적으로 생각한 것은 독일 성장소설을 많이 읽었을 때라 인격이라는 게 인간 전체에 형성된 교양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신상옥 감독님을 보게 됐다. 근데 이분이 욕설이 심했다. 그분 밑에서 4년 일했는데 나한테 부르는 호칭이 늘 욕이었다. 야, 인마, 이 새끼야, 이런 식으로 불렀다.
한번은 깜짝 놀란 것이 <내시>라는 영화를 찍을 때였다. 촬영장 종합조종실 유리를 통해 신 감독님이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별안간 커다랗게 막 웃는 거였다.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덩달아 웃으니까, 나하고 관련된 일이구나 직감했다. 나중에 선배 조감독이 나왔기에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근데 선배 얘기가 ‘야, 참 한심하다, 감독님이 너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더라.’ 라는 거였다.
4년이나 됐는데 그때까지 내 이름도 모르고 야 인마, 이 새끼야 이렇게 불렀던 거다. 갑자기 서럽고 눈물이 났다. 아, 4년 동안 헛수고 했구나, 머슴살이 한 것처럼 정말 한심했다. 그러다 <전쟁과 인간>을 촬영할 때 어떤 위험한 장면을 찍는데 신 감독님이 기특하게 봤는지, 그때 처음으로 ‘야, 장호야 수고했다’ 이러더라고….(웃음)
존경하는 감독님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분이 ‘감독은 인격’이라고 한 게 혼란스러웠다. 내보기엔 욕설이 일상인 그분이 인격자가 아닌데, 대체 왜 인격이라고 했을까, 그것이 일생동안 궁금했던 화두였다.
그러다, 깨닫는 순간이 왔다. 나이를 먹어 영화를 많이 만들다 보니 아, 신상옥 감독님이 이래서 영화감독을 인격이라고 했구나, 싶었다. 감독님 말씀은 작품을 만드는 태도가 곧 자격을 말한 거였다. 대게는 영화를 만드는 데 사심이 많지 않나. 돈을 목적으로 한다든지 인기를 목적으로 한다든지 하지 않나. 근데 신상옥 감독님은 오로지 작품이 문제였다. 작품 앞에서 진지하게 임하고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이 감독의 인격이자, 자격이었던 거다.”
“향란이에요…하는데 왈칵”
- 부모님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다. 북에 대한 정서적 관심이 남달랐을 것 같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신포면 양화면이 고향이다. 존경하는 신상옥 감독님은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이다. 서울에 태어나 살면서 고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방학 때 되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일종의 열등감을 가졌다. 꿈을 꾸면 꿈이란 게 변형이 되지 않나? 애가 유치해서인지 날아가는 꿈을 그렇게 꿨다. 북한으로 날아가는 꿈을 꾸다, 한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면, 아 여기가 북한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꿈에서 깼다. 주로 서정적인 꿈들이었는데, 지금도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애틋함이 있다.”
- 북한인권국제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북한인권 영화를 보면서부터다. 이시마루 지루 감독의 `‘노스코리아 VJ’를 보게 됐는데, 2011년까지 힘들게 사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몰래 담아 만든 기록영화다. 보다보면 어떤 소녀가 풀밭에서 무얼 채취하고 있고, 몰래카메라 찍는 사람이 너 여기서 뭐하니 하니까 토끼 먹일 풀 찾는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토끼 먹을 풀을 찾아서 뭐하냐’ 하니까 이 소녀가 ‘팔지요’ 했다.
보기엔 초등학교 6학년쯤 돼보였다.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VJ가 너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는데, 이 소녀가 스물일곱 살이라고 하는 거였다. 그때 난 충격을 받았고 너무 놀랐다. 스물일곱 살인데 깡마르고 발육이 안 돼 열두 살, 열세 살밖에 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진짜 눈물이 확 터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름이 뭐냐 하니까 김향란, 향란이에요 하는데 순간 눈물이 팍 터졌다. 부모가 이름을 예쁘게 지어줬을 때는 딸아이에 대한 희망이 있었을 테다. 그런데 뜻대로 안 되고 저렇게 피골이 상접하게, 곧 굻어죽을 것 같은 모습이 됐으니,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그걸로 북한 실정이 다 얘기됐다고 생각한다.”
“북한 다룬 영화, 사실적으로 다루고 싶어”
- 지금의 북한은 휴대폰이 보급되고, 장마당이 활성화되는 등 전 보다는 경제가 나아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떻게 보나.
“어쨌든 그건 내가 생각하기에 남한 국민의 근성, 민족성처럼, 북한사람들의 정신, 생활능력 또한 강해서라고 본다. 한 번은 소련에서 촬영을 할 때였다. 당시 소련 모스크바 주변의 주택가들의 획일적 농장을 보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 똑같은 집들이 쫙 즐비한 와중에도 어느 마당에는 배추랑 채소를 심은 집이 있고, 어느 집은 그냥 막 잡풀이 길게 자란 집이 있다.
근데 채소를 심은 집은 전부 우리나라에서 넘어간 고려인이고 막 풀이 자란 집은 러시아 사람들 집이었다. 고려인들은 채소를 심어 시장에 내다 팔고,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고, 다들 잘 산다. 무슨 말이냐면,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두환이가 정치를 잘해 우리나라가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국민성이 잘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 잘 산다고 말이다. 북한에서도 배급만 탔을 때는 아사자가 즐비하고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부분적으로 장마당을 허용했지 않나. 그게 그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인 거고, 근성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본다.”
- 북한이나, 남북문제 등을 담은 한국영화의 흐름도 정권이 바뀌고 시대변화에 따라 변천사를 달리한 듯하다. 어떻게 변해왔다고 보나.
“옛날에는 영화에서 북한을 그리면, 너무 모양이 없고 북한사람을 무조건 나쁘고 형편없이 그려야 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인 군부시절에는 북한의 모습을 멋있거나 아름답게 묘사할 수가 없었다. 일종에 반공법에 저촉됐다. 영화인들이 자숙하기를 북한도 독일군처럼 멋있는 놈은 멋있게 만들자는 분위기가 모아졌다.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북한을 미화시켰다 해서, 이적행위라고 소위 보안법에 걸려 최초로 재판도 받고 그랬다. 그 다음에 세월이 좋아지니까 박찬욱 감독이
특히 지금 정권은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하고 있어, 북한에 대해 관심을 안 가졌던 감독들도 시사성 때문에 도전해 볼 것 같다. 그런데 북한 영화를 다뤄도 기업형 흥행 영화로 훈련받고 단련이 돼 자동차 추격신 등 액션이 강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만들 것으로 본다. 저는 다시금 북한을 멋 부리지 않고 사실적으로 리얼하게 그리고 싶다. 현재 머릿속에 있는 것은, 탈북자 이야기를 사실대로 그리되 북한 이야기만 리얼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남한의 현재 모습도 사실대로 그리고 싶다. 이를 동시 진행으로 하면서 그들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가를,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느끼게 만들고 싶다. 그것이 완벽하게 정립되면 시나리오 작업도 들어가고 영화도 만들 생각이다.”
- 기독교영화에도 관심인 많고 여러 편 만들어왔다. 새로 구상하는 것이 있다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이후부터 크리스천이 됐고, 내가 자랑할 유일한 것은 크리스천이 됐다는 거다. 처음 교회를 다니면서 만들었던 영화가 1982년 <낮은 대로 임하소서>다. 시각장애인 목사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이후 제대로 기독교 영화를 만들고자 2014년 <시선>등을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다. 이번에 세 번째 도전을 준비 중에 있다. 실화인데 1912년 미국에서 선교활동을 위해 전라남도 광주로 온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이란 여자의 얘기다. 22년 동안 있으면서 1934년 영양결핍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성인권과 교육에 힘쓰고, 간호사를 양성해 나환자들 돌봤다. 또 열세 명을 딸로 입양해 훌륭한 인재로 키웠고, 문둥병 환자를 업어 돌봤다.
이분이 생을 마감한 뒤에 보니까, 보리 몇 톨과 치마저고리, 담요반장의 유품이 전부였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때문에 일본 놈들도 사회장 일호로 시신을 치웠다. 그럼에도 수천 명의 여학생들, 간호사들, 문둥병들이 장례행렬을 이루며 우는데 그 통곡소리가 비행기 폭음 같다고 해서 서울의 동아일보 전면에 게재됐다. 기사가 아직도 자료로 남아있는데 살아있는 예수라고 소개될 정도로 감동적이다. 근데 이분의 이야기를 광주사람들도, 한국 기독교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영화를 만들려고 4년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 온누리 기독교 TV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얼마 전 흑백다큐멘터리로 극장에 개봉되긴 했다. 난 극영화로 만들 계획이다.”
- 올해 들어 남북정상회담 등 한반도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고 있다. 기대하는 바는.
“생각지도 못했던 건데 잘되기를 바란다. 남북관계 개선을 기회로 북한 주민들한테도 숨통을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음 한다. 교류의 물꼬가 트여야 이북도 도와주게 되지 않나. 비핵화를 이룬다면, 북핵이 없는 마당에 김정은 혼자서 다 먹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한반도 평화의 봄과 함께 교류할 날이 오면, 부모님 고향이자 저한테는 일종의 로망인 북청의 바다를 보러가고 싶다. 당시 할아버지가 명태잡이 배를 여러 척 갖고 바다를 상대로 돈을 버셨다고 하니까, 신포 앞바다의 양화면, 명사십리 이런 곳을 둘러보고 싶다.
남북이 이질감을 극복해나가며, 서로 조화를 이뤄나가기를 희망한다. 1990년대 뉴욕에서 남북코리아 영화제 참가당시 북한 영화를 우리 영화와 비교해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북한배우들을 보면, 정서적으로 청초하고 소박하고, 순박한 모습이었다. 순수한 인상을 줬다. 그런데 영화가 너무 정치선전을 해, 보기 역겨웠다. 반면 남쪽의 영화들은 정치 선전은 없었지만, 시작하자마자 베드신 나오고 선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예로 든거지만, 남북이 좋은 점은 서로 배워나가며 융화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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