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
대학생에게 물었다. 정당을 선택한다면 어떤 정당을 선택하겠는가? 대답은 간결했다. 선거에서 공천을 목표로 한다면 공천 확률이 높은 정당을 선택할 것이고, 투표를 기준으로 한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정당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연령층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정당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이념 논쟁으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 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많은 젊은이들에게 정당의 선택은 롯데 백화점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현대 백화점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수준으로 보였다. 입점을 해서 물건을 팔아야 한다면 입점이 쉽고 조건이 좋은 백화점을 택할 것이고, 물건을 사야한다면 같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백화점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이념논쟁과 정치과잉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헌정사를 돌이켜 보면 요즘 젊은 세대들의 탈이념·탈정치화는 바람직하다는 분석도 있다.
탈이념·탈정치화는 우리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1945년 이후 유럽 국가들에서 복지정책이 확산되면서 좌우 이념논쟁은 점차 약화되었고, 지지 정당이 선거 때마다 바뀌는 정당의 유동성은 커지고 있다. 이처럼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정당 가입률도 1970년대 20%대에서 현재는 5%대로 낮아졌다. 더 비관적인 분석도 있다. 2005년 미국의 격월간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2040년경에 없어지는 것들 중 하나로 정당을 명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에서 좌우논쟁은 여전히 정당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진영논리로 자리하고 있고, 종편을 비롯한 많은 방송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현장을 중계하고 있다. 전통시장 골목길에서 초로의 점포주인이 팟캐스트를 틀어 놓고 논객들의 정치평론을 들으면서 장사하는 것도 흔한 모습이 되었다. 20~30대 젊은 세대와 달리 격동기를 살아온 이들에게 정치 이야기는 삶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들이 다 은퇴하고 남북이 통일되고서야 우리의 정치권은 좌우 이념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통일의 날은 예측할 수 없지만, 586세대가 이미 50대 중반이 되었으니 세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변화의 날도 멀지 않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과 남북 정상회담 기간 중 보여준 젊은 세대들의 반응에서 그 변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좌우 이념 논쟁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청산되어야 할 적폐로 보일 수도 있다. 이념보다는 현실적인 삶이 그들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관심이 되었다.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으로 포장된 진영논리가 아니라 이슈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해법 그리고 실천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인 셈이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는 세계사적으로 정당의 발전과정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간부정당(cadre party)으로 시작된 정당이 산업사회에서 이념대결에 기초한 대중정당(mass party)으로 발전하였고, 이들 정당이 선거 전문가 정당(electoral-professional party)과 이념 성향이 희박한 포괄정당(catch all party)으로 변모해온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세대 간 인식은 그렇게 바뀌고 있는데, 우리의 정당체제와 문화는 아직도 대중정당(mass party)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헌법개정 논의 과정에서도 이러한 추이를 반영한 변화의식과 전통의식이 충돌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변화세력은 합의제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전통세력은 다수결 민주주의를 추종하고 있다. 변화세력은 연대와 협치 과정에서 권력의 주도를 추구하고, 전통세력은 대결적 국면에서 권력의 독점을 추구한다. 전통세력들은 좌우 이념대립을 정치투쟁의 방편으로 이용해 왔다. 그러나 한국정치는 이제 전면적 대결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첫걸음은 좌우 이념논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제도적으로 합의제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것이다.
촛불정국과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한국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정당들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있었던 그 흔한 당내 정풍운동도 보이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이 가치 논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념적 편향성으로 비판을 받으면서도 주요 이슈를 선점해온데 반해 자유한국당은 이념논쟁에 치우쳐 선도적 이슈개발에 실패한 결과다. 지방선거의 결과와 관계없이 자유한국당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 첫걸음은 이념정당에서 탈피해 이슈정당으로 가는 것이며 합의제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치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자유한국당이 6·13 지방선거를 의식해 불필요한 좌우 이념논쟁을 또 다시 일으키고 그 틀에 갇힌다면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거 후 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 정치학 박사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 행정자치부 중앙 자문위원
-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
- 경희 대학교 객원교수
- 고려 대학교 연구교수
- 국민 대학교 정치대학원 겸임교수(현)
-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