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70년 경선패배 불구 DJ 지원 ‘유일한 모범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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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70년 경선패배 불구 DJ 지원 ‘유일한 모범사례’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8.11.28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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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박찬종 야권단일화 삭발투쟁 불구 결국 수포로
97년 신한국당 9龍 각축전속 최형우 선두로 급부상
16대 대선 노무현 막판바람 일으키며 이인제 벽 넘어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회동을 가졌다. 물론 화합을 위해서다. 하지만 두 사람간의 회동이 화합은커녕 갈등만 더 키우고 있다. 회동 이틀 뒤 청와대가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에게 당 대표직을 제안했다”고 밝히면서부터 갈등은 악화됐다. 박 전 대표 측은 이에 대해 “뒤통수를 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제 양측 간에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표현이 나돌 만큼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실제로 이 대통령 측과 박 전 대표 측이 ‘한나라당’이라는 한 배를 타고 있지만 딴살림을 하고 있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 ‘친박 인사를 몰살시켰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당 내 친박 인사 대부분은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에 박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공천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고, 낙천한 친박 인사들은 ‘친박연대’와 무소속 친박연대를 만들어 총선에 나왔다. 이들은 ‘박풍(朴風)’에 힘입어 18대 총선에서 대거 당선됐다. 당선 직후 박 전 대표 측은 “이들을 모두 복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친이계 내부에서는 박 전 대표에 대해 ‘해당행위’라며 ‘복당불가’ 입장을 밝혔다.

양측 간의 갈등은 이제 분당으로 치닫고 있는 분위기다. 이 같은 갈등의 시초를 지난해 대선후보경선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양측 간에 치열한 경선전이 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분석이다. 지난 대선후보경선을 돌이켜보면 결국 양측이 헤어진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18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직선제 아래에서 치러진 87년 13대 대통령 선거의 가장 큰 이슈는 ‘군정이냐, 민정이냐’였다.
군 출신인 집권여당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는 김영삼(YS)과 김대중(DJ)이라는 두 대권주자가 있었다. 당시 국민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군정종식’은 야권 단일화가 이뤄지면 가능할 듯 보였다. 박찬종 등은 삭발을 하며 ‘단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둘은 끝내 야권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아예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자체가 없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렸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모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이론적으론 그럴 듯했다. 영남에서 노태우 후보와 YS가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JP) 후보가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대통령이 된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야권후보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아 승리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로 갔다.

92년 14대 대선에서도 대선주자 간 경선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다.

당시 정치지형은 ‘민정-민주-공화’ 등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자당과 DJ와 이기택이 공동전선을 형성한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양당체제였다.

야권에선 일찌감치 DJ가 대선후보로 나섰다. 여권에선 YS가 가장 앞서 나갔다.

이에 ‘YS에 맞설 수 있는 민정계 후보를 내자’며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민정계 의원인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박준병 심명보 등이 7인 협의회를 만들어 YS에 대항했다.

7인협의회 심야회동을 통해 후보로 발탁된 이종찬은 YS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 광화문에 선거캠프를 차렸다.

박태준이 선대명예위원장, 채문식, 윤길중 등이 각각 선대위원장과 고문을 맡았다. 하지만 7인협의회 중 이한동과 박준병은 YS 진영에 합류할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이종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경선 이틀을 남겨두고 이종찬은 경선불참선언을 했다. 하지만 경선은 예정대로 92년 5월19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치러졌고, YS는 이날 민자당의 제14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종찬은 새한국당을 만들어 나가며 대선출마선언을 했다. 하지만 결국 완주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했다. 97년 15대 대선에서도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놓고 후보 간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김덕룡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을 형성하며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들 중 최형우는 당 내 자파 대의원 중 3분의 2이상 지지를 이끌어내며 가장 앞서나갔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YS가 최형우의 대선출마를 주저앉히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원종 정무수석이 최형우를 만나 담판을 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문에 가장 주목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형우는 힘들다’는 얘기가 회자됐다.

당시 필자는 사석에서 최형우를 만나 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이때 최형우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YS를 모셨다기보다는 30년 정치를 함께해온 ‘동지’다. 때문에 YS가 나의 대선출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입장이 못 된다. 또 그렇게 할(대선행보 중단요구) 분도 아니다. 나를 주저앉히기 위해 다른 진영에서 퍼트린 헛소문이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최형우의 대선행보를 YS가 중단시켰다’는 말은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사실이야 두 사람만이 알 일이다.

당시 신한국당 경선은 ‘공정성’이 가장 큰 이슈였다. ‘대표는 경선에 출마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주장했던 이회창 대표가 이를 어기고 경선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표 프리미엄’을 업고 이회창은 ‘대세론’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제15대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인제는 국민지지도 등을 들어 경선에 불복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한 후, 서석재 등과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에 뛰어들었으나 낙선했다. 그 당시 경선은 ‘불공정 경선’이란 게 대세였다. 박찬종 이홍구 등은 경선과정의 절차를 문제 삼아 사퇴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당시 경선에 대해 “불공정 경선이었다. 때문에 이인제의 경선불복을 심정적으로 동의한다. 나도 불복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여권인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국민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인제 노무현 한화갑 김중권 정동영 김근태 유종근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경선에 참여했다. 이인제가 가장 앞서나갔으나 경선 중간부터 노무현이 파란을 일으키며 ‘이인제’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이때 치러진 민주당 경선도 온전히 ‘노무현’ 중심으로 가지 않았다.

대선이 가열되면서 노무현 지지도가 하락하자, 민주당 일각에서는 ‘후보교체론’을 내세우며 정몽준지지로 돌아서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민석은 탈당한 후 정몽준 캠프로 들어갔다.

이인제도 선거막판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로 인해 이인제는 지금까지도 ‘경선 불복자’로 낙인이 찍혀있다.

그렇다면 한국정당사 속에서 경선이 늘 이런 파열음만을 일으켰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은 ‘민주주의란 무엇이냐’에 대한 모범적 답이 될 만하다.

당시 신민당 3선 의원이었던 YS는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것. 이에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유진산은 “YS의 대선출마는 그야말로 구상유치(口尙乳臭)”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이후 DJ와 이철승이 대선경선에 뛰어들며 ‘40대 기수론’은 신민당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진산은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YS DJ 이철승 중 한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YS와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리 없다고 판단한 DJ는 이를 거부했다. YS와 이철승은 유진산을 만나, ‘유진산이 추천하는 후보를 밀겠다’고 서약했다.

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은 “나는 당수로서 YS를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YS는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이철승의 배신으로 DJ가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YS는 당시 경선에 대해 문제를 삼을 수도 있었지만 깨끗이 승복했다. 이뿐 아니라 DJ 당선을 위해 전국으로 지원유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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