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인사(人事)는 메시지다. 인사권자의 선택을 분석하면, 그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다. 가령 문재인 대통령이 장하성 교수를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소득주도성장’을 추진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어떤 조직이든 인사권자의 결정은 조직이 지향하는 철학과 가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의 행보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국당 비대위는 지난 6일 비대위 산하 4개 소위원회와 1개 특별위원회 구성을 마쳤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소위’라고 공언했던 ‘좌표·가치 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홍성걸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를 선임했다.
취임 직후부터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를 ‘국가주의’라고 비판해왔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 국가주의적 경향이 있다. 연방제에 가까운 분권화를 말하는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그런 법이 그냥 통과되고 공포됐다”고 날을 세우더니, ‘초·중·고 커피 판매 금지법’이나 ‘먹방 규제’ 등을 예로 들면서 국가주의 프레임을 강화했다.
지난 6일에도 김 위원장은 비대위 회의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가주의 틀 속에서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 적지 않다”며 “시장이나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국가가 관여를 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를 국가주의로 비판하면서, 한국당을 자율주의 정당으로 포지셔닝하려는 것으로 해석됐다.
문제는 ‘좌표·가치 재정립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홍 교수가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역사교육 정상화’라고 주장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알려진 대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국가주의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기저에는 학생들에게 국가가 원하는, 국가에 도움이 되는 역사관을 주입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한 직후 검정으로 발행되던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까닭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의 목적’을 위해, 아이들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저마다의 신념과 가치를 형성할 기회를 박탈했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지만 홍 교수는 지난 정권에서 “교과서 국정화 반대는 논리적 합리성을 결여했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역사교육 정상화’로 평가했던 학자다. 다시 말해 김 위원장은 한쪽으로 문재인 정부를 국가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대표적 국가주의 정책에 동의했던 인사(人士)를 ‘좌표·가치 재정립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한 셈이다.
올해 초 김 위원장은 한 언론사 칼럼에서 “싫든 좋든 역사는 다양성을 향해, 또 시장과 시민사회의 자율을 존중하는 쪽으로 흐른다. 이 거대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국당은 집권당 시절 국민의 역사관까지 국가권력으로 통제하려 했다. ‘1948년 건국’ 등이 옳다고 믿으면 이를 논리로 다툴 일이지, 국정교과서로 이를 강제할 일이더냐. 또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더냐”라며 박근혜 정부의 국가주의적 발상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동안의 발자취로 볼 때, 김 위원장은 탈국가주의와 민간의 자유를 중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자였던 홍 교수를, 그것도 ‘좌표·가치 재정립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탈이념·탈국가주의를 내세웠던 김 위원장의 그간 행보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인사다. 과연 이 기묘한 동거를 결심한 김 위원장의 속뜻은 무엇일까. 일각의 지적대로, 지난 한 달여간 ‘정치의 생리’을 깨달은 김 위원장이 ‘어려운 변화’보다는 ‘쉬운 타협’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