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최신형 기자]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을 만나러 갔다. 한때 참여정부의 국민경제비서관을 역임했던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6년 당시 한미 FTA 추진을 선언하자, 가장 앞선 대열에서 한미 FTA 반대론을 펼쳤다.
“민주화운동의 선배, 동지, 후배들과의 인연을 끊겠다. 그 왕년의 투사들이 함께 모여 한미 FTA 비준 동의를 꾀한다면, 그들은 이미 민중의 편이 아닌, 재벌과 재경부, 조·중·동이라는 삼각동맹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정 원장이 2007년 8월 10일 민주노동당 입당을 선언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후 진보신당 입당, 민노당 부설연구기관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에 이르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반(反)한미 FTA 진영에 서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 송기호 변호사, 우석훈 경제학 박사와 마찬가지로.
한미 FTA 반대론자들의 경제 선생으로 불리는 정 원장이 19일 오후 5시 서울 YMCA에서 <한미 FTA와 복지는 양립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인 ‘한미 FTA’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복지’의 어젠다가 만난 셈이다.
여야가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놓고 권력 다툼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미 FTA와 관련해선 민노-진보신당을 제외한 제 정당이 모두 공범이다. 정 원장도 강연 이후 민주당이 한미 FTA 10+2 재재협상 요구한 것과 관련해 “내가 말했던 독소조항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쓴소리를 던졌다.
그의 강의 결론은 간단하다. “한미 FTA와 복지의 양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유 역시 간단하다. “시장의 영역을 확대하는 한미 FTA와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는 복지정책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 정 원장의 주장이다. 그는 덧붙였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민간서비스와 경쟁하는 공공서비스는 전부 문제가 된다.”
강의가 시작되자 정 원장은 한미 FTA를 추진하기 시작했던 2006년과 2011년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미국발 금융위기의 발발, 두 번째는 지난해 6·2 지방선거 이후 나타난 복지에 대한 국민적 요구다. 정 원장이 이날 강연의 주제를 <한미 FTA와 복지는 양립 가능한가>로 정한 이유도 이 같은 상황변화의 대응 차원으로 보인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글로벌 불균형으로 인해 일방적인 양적 완화를 단행했다. 미국은 부채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달러를 찍어내면서 통화가치의 절상을 노렸고, 보호무역주의적인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현재 미국의 경제위기 지속성과 금융위기의 재발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정 원장은 이후 한미 FTA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한미 FTA는 관세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는 지적재산권-투자-서비스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관세와는 관계가 없다. 법과 제도 변경의 문제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주장했던 “서비스 산업을 위해 한미 FTA를 해야 한다”는 논거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정 원장은 한미 FTA의 독소조항로 불리는 투자자 국가제소권(ISD-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권한)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한미 FTA에 들어 있는 투자자 국가제소권은 한국의 행정법원이 아닌 제3의 민간기구가 심판을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미국 A라는 민간보험사가 우리의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ISD를 행사했습니다. 그러면 미국 A사가 1명, 국민건강보함공단이 1명, 양측이 합의한 1명 등 총 3명의 변호사가 중재위원회를 만들어 심판을 합니다. 선임된 변호사들은 한국의 제도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법과 제도가 한미 FTA 협정문을 과도하게 위반하고 있는지만 봅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요. 당연히 한국 정부가 패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요? 미국은 건강보험제도가 없잖아요. 간단해요. 또 이들 3명의 변호사는 미국 변호사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유요? 그래야 말이 통하잖아요.”
정 원장은 그러면서 “한미 FTA가 발효되면 한국 정부의 공무원들이 ISD 위반 위험성이 내포된 정책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등) 대권주자들이 차기 선거 때 건강보험의 공공성 강화를 외치겠지만, 한미 FTA가 발효되면 건강보험의 (공공성) 효력이 상실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 원장은 투자자-국가 제소권의 엇갈린 판결도 소개했다. 정 원장은 “금융위기 때 아르헨티나 정부가 긴조치를 단행한 이후 현재 약80여건의 투자자 국가제소가 진행 중”이라면서 “대다수 미국정부가 승소할 뿐 아니라 동일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판결이 내려지고 심지어 동일인이 서로 다른 판결을 하는 등 기준도 불분명하다”고 꼬집었다.
투자자 국가 제소권은 한미 FTA 추진 당시부터 독소조항의 맨 선두에 섰다. 우리의 헌법 재산권 조항이 간접수용을 허용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한미 FTA의 협정문 11장 투자조항의 부속서 11-b의 수용 조항엔 간접수용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의 기업 투자자가 정부의 규제에 의한 자산가치 하락만으로도 정부를 상대로 제소권을 행사하며 미래의 기대이익까지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이 투자자 국가제소권을 이유로 한미 FTA의 협상 폐기를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어 정 원장은 한미 FTA-수출간의 관계에 대해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은 캐나다와 멕시코의 성장률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면서 “정부당국은 한미 FTA로 인해 수출과 투자 증가→경제성장률 증가→복지 증가를 주장하지만, 양극화를 늘리는 정책을 쓰고 복지정책을 통해 그 벌어진 양극화를 좁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투자자 국가제소권 뿐 아니라 서비스 시장 개방의 네거티브 방식, 역진불가(래칫, 규제 완화시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 미래 최혜국 대우 조항을 한미 FTA의 독소조항으로 꼽았다.
“한미 FTA는 헌법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 파괴력을 지녔다. 미국식 FTA를 EU와 맺은 나라는 멕시코와 칠레 밖에 없다. 한미 FTA를 맺지 못하면 후진국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다. 한미 FTA는 국회가 좀 더 검토하고,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 차기 정부에서 논의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