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 '탈정유'…주력사업 재편 시동
배터리연구소 확대 등 대규모 투자 봇물
‘제2 반도체 신화 만들기' 힘찬 뱃고동
매주 사원들과 식사하며 격의없는 소통
소통으로 혁신 이끄는 ‘딥 체인지’ 전략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기범 기자]
올해 SK이노베이션 대표의 첫 생산 현장 방문지는 서산·증평의 배터리·소재 공장이었다.
새해 첫날마다 SK이노베이션 CEO가 정유·화학 생산거점인 울산 컴플렉스를 의례적으로 방문했던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동시에 이는 SK이노베이션의 미래 주력 사업 판도가 바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전기차 배터리사업과 소재사업에 SK이노베이션의 사활을 걸겠다는 회사 대표의 의중이 담겨졌기 때문이다.
‘정유회사’로 알려진 SK이노베이션의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를 이끄는 김준 대표의 공격적 투자가 예사롭지 않다.
2017년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에 선임된 김 대표는 SK그룹 내에서 손꼽히는 ‘전략통’이다. 더욱이 김 대표는 SK의 본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유공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석유사업부를 거치며 김 대표가 지니게 된 정유부문 전문성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밑바탕이다.
SK그룹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사업지원팀장과 SK에너지 에너지전략본부장이라는 이력은 SK에너지 대표이사가 되는 교두보가 됐다. 결국 SK에너지 대표 시절 수익구조를 개선하고 석유사업 흑자를 이뤄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에 올랐다.
그러나 명석한 두뇌로 최태원 SK 회장의 브레인으로 각광받는 김 대표는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에 오르자 정작 ‘탈(脫)정유’를 주창했다.
지속성장이 가능한 배터리와 소재사업에서 SK이노베이션의 미래 먹거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김 대표의 의지였다. 현재의 자신을 만든 유공 출신 SK 최고 전략가가 던진 승부수였다. 김 대표식(式) 딥 체인지의 시발이다.
후발주자의 약점을 극복하고자 김 대표는 선제적 투자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SK이노베이션을 맡자마자 배터리연구소 확대와 핵심기술 개발부서 신설을 통해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에 전기차 배터리에 6조원을 투자하고 2025년까지 세계시장 30%를 점유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배터리 톱3’로의 진입은 전기차 배터리가 ‘제2의 반도체’라는 김 대표의 신념에서 나온 전사적 목표였다.
이를 위해 김 대표는 한국·유럽·중국·미국에 전기차 배터리 생산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고객사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우선 유럽 제2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에 9452억원 투자를 결정하고, 이미 제1공장을 건설 중인 헝가리 코마롬시 43만㎡ 부지 내에 용지 11만6000㎡를 확보했다.
이어 지난 3월엔 미국 조지아주 잭슨카운티 커머스시에서 전기차 배터리 생산 공장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조지아주 공장은 SK이노베이션이 전기차 최대 격전지인 미국에 처음 구축하는 배터리 생산시설이다.
현재 가동 중인 서산 공장(4.7GWh)을 비롯해 헝가리 코마롬 제1공장(7.5GWh)과 중국 창저우 공장(7.5GWh)이 2020년 상반기 완공되고, 코마론 제2공장(10GWh)과 조지아주 공장(10GWh)이 2022년 양산에 들어가면 40GWh로 생산능력이 늘어난다.
이미 올 초 김 대표는 2022년까지 연 60GWh의 생산능력을 갖추겠다며, 오는 2025년까지 100GWh 규모 생산능력 확보를 위한 16억7000만달러(약1조9000억원) 투자 계획까지 밝혔다.
지난 14일 결의한 두 번째 중국 배터리 생산 공장 건설 투자도 그 계획의 일환이다. 이번에 총 5799억원 투자를 결정한 중국 신규 공장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생산능력은 훨씬 늘어난다.
SK이노베이션에서 생산되는 배터리는 폭스바겐이라는 안정적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작년 11월 양 사가 체결한 2022~2029년 배터리 공급 계약은 폭스바겐의 신규 전기차 2200만대 생산에 기여할 예정이다.
김 대표와 SK이노베이션의 과감한 투자는 올해 세계 전기차 배터리시장 점유율 10위 안에 처음 진입하는 성과로 나타났다. 올 1분기 세계 전기차 탑재 배터리 사용량 순위에서 SK이노베이션은 9위를 차지했다. CATL과 BYD 등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 업체들을 제외하면 SK이노베이션은 6위에 해당된다.
지난 3월 말 현재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누적 수주잔고는 430GWh다. 약 50조원에 달하는 규모다.
SK이노베이션이 또 다른 중점을 두고 있는 소재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SK이노베이션은 중국 창저우와 폴란드 실롱스크에 각기 연 3억4000만㎡ 규모의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막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1500억원을 들인 증평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막 공장 증설이 오는 11월 완료되면 생산량은 5억3000만㎡까지 확대된다. 설립될 새 공장과 증설되는 기존 공장을 모두 합칠 경우 SK이노베이션의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막 생산량은 연 12억1000만㎡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휘는 유리’ 투명 폴리이미드필름은 SK이노베이션이 독자 기술로 개발해 ‘FCW(Flexible Cover Window)’라는 이름으로 지난 1월 ‘CES 2019’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은 투명 폴리이미드필름 역시 오는 10월 증평 상업설비에서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소재사업이 경쟁력을 갖췄다고 판단해 물적 분할로 지난 4월 여섯 번째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를 설립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앞으로 소재사업 전문성을 넓혀 SK이노베이션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첨병이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아직 김 대표가 가야 할 길은 멀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은 적자다.
SK이노베이션은 작년 매출 54조5109억원, 영업이익 2조1176억원을 기록했다. 그중 배터리사업은 매출 3482억원, 영업손실 3175억원을 거뒀다. 유럽 고객사 대상으로 전기차 배터리 공급이 늘어 매출은 전년보다 139% 늘었지만, 투자 확대와 인력 충원은 적자폭을 늘리는 원인이 됐다. 김 대표는 2021년까지 손익분기점을 넘겠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사업 수익성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배터리·소재사업도 2025년까지 연 평균 37%에 이르는 영업이익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연결기준으로 올해 매출 53조6230억원, 영업이익 2조4310억원이 점쳐지고 있다. 전년 대비 1.6% 감소한 매출이지만, 영업이익은 14.8% 증가하는 액수다.
이른바 ‘딥 체인지 2.0’에 기반한 사업구조 혁신으로 비정유 부문 경쟁력 강화에 팔을 걷어붙인 김 대표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미중 무역분쟁 등 불확실한 글로벌 경제와 유가나 환율 변동에 따른 경기 하락 가능성은 김 대표의 구상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김 대표는 앞으로 있을 파고에 구성원 간 ‘소통과 협업’이라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근원적 방편으로 대응할 요량이다. 애자일(Agile) 조직의 탄력성 안에서 경계를 허물고 구성원의 역량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소통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매주 사원들과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모습은 여느 회사 사장이라도 연출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소통이라는 원칙은 고수하되, 조직의 근본적 변화를 이뤄내려는 진정한 혁신 의지는 쉽사리 볼 수 없는 CEO의 덕목이다.
김 대표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할 이유다.
좌우명 : 파천황 (破天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