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흔히들 정치를 ‘타협의 예술’이라고 한다.
여당과 야당 간의 갈등으로 국회정상화가 요원할 때, 정부와 국회의 엇박자로 정국이 꽉 막혔을 때, 일각에서는 ‘제발 협치 좀 하라’며 한 가지 예시를 꺼내든다. 바로 1989년 민주정의당 김윤환 원내총무(원내대표)와 평화민주당 김원기 총무의 협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간평가’ 공약이 유보된 일이다.
지난 6월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와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협상이 결렬되며 국회정상화가 무기한 연기됐을 때도, 언론은 일명 ‘중평유보(중간평가 공약유보)’ 사건을 언급하며 ‘협상과 소통의 정치’를 거듭 강조한 바 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앞서 말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7년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세웠던 중간평가가 철회되는 과정이다.
1987.12.12.
대선 4일 전인 1987년 12월 12일 오후, 노태우의 서울 여의도 유세 현장. 이날 여의도 유세장은 연설 두 시간 전부터 모여든 청중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광장에는 ‘미래민족문제연구연합회’, ‘월계수동지회’ 등이 적힌 플래카드와 깃발이 나부꼈다.
노태우 후보는 사람들 앞에서 중간평가 공약을 다음과 같이 전격 발표했다.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오늘의 약속을 포함해서 6·29 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면 임기 도중 재신임 투표, 즉 중간 평가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재차 인정받겠다는 승부수였다. 이런 파격적인 선언과 더불어 노태우의 “나 이 사람, 보통사람, 믿어주세요”라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캐치프레이즈는 전두환 정권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인 그를 미심쩍어했던 부동층의 표심을 대거 사로잡았다.
1987년 대선(大選)후보로 나서면서 나는 ‘중간평가’를 공약했었다. 그해 12월12일 서울 여의도 유세에서였다.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오늘의 약속을 포함해서 6.29 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여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범주에는 대통령직 사퇴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정치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믿음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신뢰도를 높여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6.29선언과 대통령 선거 공약의 실천 여부를 중간평가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확인받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중략) ‘대통령에 당선되어 올림픽을 마치고 국민과의 약속대로 중간평가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은 1988년을 거쳐 1989년 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물론 야당 측에서는 중간평가를 하라고 요구했고, 여당 내에서는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평가를 해야 된다’는 주장과 ‘엄청난 국력(國力)낭비이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나는 중간평가를 하기로 작정하고 청와대 참모들과 당에 “올림픽이 끝난 후에 중간평가를 실시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68~469페이지
1987.12.16. 제13대 대선
노태우의 승부수는 적중(的中)했다.
1987년 10월 29일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제9차 개정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총 36.6%의 득표율로 2위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득표율 8.6%p, 194만 5157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3위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은 27.0%로, 2위인 김영삼 후보와 고작 1%p차였다.
정치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나, 당시 양김이 단일화를 성공했다면 군부는 완전 종식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었다. PK와 호남, 서울권의 표를 흡수해 야권 후보가 승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다. 박찬종 전 국회의원은 상도동계·동교동계 의원 12인과 함께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단식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김영삼은 노태우의 중간평가 공약에 대해 처음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노태우가 재신임 투표 이슈를 광주항쟁 사건 포함 ‘5공 비리’를 묻어버리는 데 악용하거나, 아예 공약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미리 내다본 것이다.
1988년 12월 27일, 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노태우에 대한 중간평가는 5공의 부정과 비리, 그리고 광주항쟁에 관련된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된 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인터뷰에서 “정부, 여당이 만일의 경우 중간평가를 신임투표로 연계시키면서 5공화국 관련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또 노태우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 방법, 그리고 신임투표와의 연계문제 등은 “상당부분 복안을 갖고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노대통령이 결정해 밝힐 때까지 유보하겠다”고 말하고, “중간평가는 정부, 여당 스스로 국민들에게 한 약속이기 때문에 꼭 지켜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66페이지 中
그의 근심을 뒤로한 채, 군부 독재의 잔여 세력이 규합한 제6공화국은 화려하게 출범했다.
1988.04.26. 제13대 총선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한지 두 달이 지난 4월 26일, 새로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의석수는 제12대 때보다 총 23석이 늘어난 299석(지역구 224, 전국구 75)으로, 직접선거에 따라 선거구별로 최다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하는 소선거구제(지역구)와 의석 비율에 따라 정당에 배분하는 비례대표제(전국구)로 최초 배분됐다.
이는 현재까지 적용중인 선거구제의 모태(母胎)로, 소선거구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하는 과정에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총선 전 야권통합을 완성하려고 했으나, 김대중은 “소선거구제에 합의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겠다”고 강조하며 한 발 물러섰다.
김영삼은 고심 끝에 의석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였지만, 끝내 야당 통합은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한 평민당 측의 번복(翻覆)으로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위의 갈등에 대해선 다음 편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총선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 총 125석을 차지해 제1당 자리에 등극했으나,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제1야당은 70석의 평민당(지역구 54, 전국구 16)이 차지했고, 제2야당은 59석의 민주당(지역구 46, 전국구 13), 제3당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35석의 신민주공화당(지역구 27, 전국구 8) 순으로 배분됐다
여당인 민정당이 전체 의석의 42%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황으로, 한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한 것이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당시 여당의 힘이 간절했을 노태우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의외의 결과”라고 놀라면서도 “여당이 교만했다”고 반성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개정 법률에 의해 소선거구제로 실시하게 되었다. 민정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도 압승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중략) 선거 기간 중 수시로 올라오는 관련 기간의 정보 보고서는 어김없이 3분의 2 내외의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무리 못해도 과반수는 문제없다는 것이었다.
선거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지역구 총 224석 중 민정당 87석, 평민당 54석, 민주당 46석, 공화당 27석, 무소속 10석으로, 여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여소야대의 어려운 국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중략) 나는 ‘원인 없는 결과 없다’고, 여당 측이 너무 과신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그런 여당을 보면서 6공화국이 과거와 같은 체제로 회귀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37~438페이지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 대한민국은 세 솥발 정국, 즉 ‘3김(YS·DJ·JP)시대’가 됐다. 야당의 기세는 ‘5공 청문회’와 맞물려 기름을 끼얹은 듯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89.02.03.~1989.03.03.
노 대통령의 취임 1주년 아침. 노태우는 청와대 관계자들을 모아 “당과 정부는 언제라도 중간평가를 실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 당시 좋아진 정치 환경을 염두에 둔 작업이었다.
노태우는 중간평가 승리를 통해 야당의 기세를 억누르고,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이어지는 군부 세력의 과오들을 덮고자 했다.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박석무 등 다수 야당 의원들이 대거 활약하면서, 노태우 정부의 치부까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겐 국면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런 면에서 재신임 투표는 좋은 도구였다. 동시에 모든 것을 잃는 자충수(自充手)로 전락할 수 있는, 양면적 칼날이기도 했다.
중간평가를 해야 한다는 입장은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내 개인적으로는 87년 대선에서 “3김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이야기했던 만큼 중간평가를 통해 한 번 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권 일부에서는 야권이 ‘5공 청산’ 문제를 너무 거세게 들고 나온 데 대해 중간평가로 그 공세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야권(野圈)에서는 ‘중간평가를 통해 이 정권을 몰아내자’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가장 강력하게 중간평가 실시를 요구했다.
반면 중간평가를 하지 말자는 반대 의견도 여야(與野)에 모두 있었다. 여권(與圈)에서는 국가적으로 큰 혼란이 야기된다는 점과 헌법상 문제를 제기했다. 중간평가를 하자면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헌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야권(野圈)에서도 김종필 총재의 경우는 위헌(違憲) 소지를 들어 중간평가를 처음부터 반대했다. 김 총재는 “헌법상 보장된 대통령 임기를 물리적으로 조정하려는 처사는 거당적으로 반대한다”며 중간평가를 “헌법에도 없는 철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중간평가를 실시함으로써 3김 시대를 끝내기보다는 부정투표 시비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5공 청산 정국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나는 이 같은 찬반론에 대해 1989년 1월1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략)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택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물론 우리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알아서 내 스스로 결정할 작정입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69~471페이지
반면 야당의 반응은 3인3색으로, 저마다 각각 셈법이 달랐다.
2월 25일, 김대중은 언론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민정당이 신임 연계 중간 평가를 강행하려 함은 국민에게 심판을 받으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중간 평가를 악용하려는 저의가 보입니다. 5공 비리 청산이나 민주화, 민생 문제 해결 등이 완전 매듭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보고 평가한단 말입니까.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제반 작업이 마무리된 다음에 중간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노태우가 중간평가를 악용해 여소야대 정국을 개편하고 5공 비리를 덮으려고 한다고 분석한 김대중. 그는 공식적으로는 ‘일단 유보’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는 노태우가 중간평가에서 재신임을 인정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불안한 속내도 깔려 있었다.
1989년 새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돌연 ‘노태우 대통령 중간 평가’를 들고 나왔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종반에 당선이 위태롭다고 판단해 당선되면 중간 평가를 받겠다고 공약했다. 그것은 결국 덫이요 족쇄였다. 이를 민주당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서둘 일이 아니었다. 나는 노 대통령이 5공 비리 척결과 민주화 조치를 얼마나 이행하는지를 지켜본 후에 중간 평가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중략) 나는 노 대통령이 조기 중간 평가를 통해 국민 신임을 얻는다면 여권 내에 극우 세력이 득세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 국민 투표에 부친다면 노 대통령의 불신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 대통령의 인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국민들이 선거로 인한 혼란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부 여당에서도 중간 평가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류가 있었다. 민정당에서는 중간 평가를 실시하여 여소야대의 수세적인 국면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반면 노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은 만에 하나 부결될 수 있음을 염려하여 이에 반대했다. 중간 평가의 유보, 또는 무산을 주장하는 측은 사실 소수에 불과했다.
민정당은 2월 8일 신임과 연계하는 형식의 국민 투표 중간 평가를 노 대통령에게 공식 건의했다. 박준규 대표는 “중간 평가에서 노 대통령이 신임을 받으면 지금처럼 야당 마음대로 정국이 운영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중간 평가로 여소야대 정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여기서 동력을 얻어 정계 개편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민정당은 내가 우려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50~551페이지
김종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헌법상 보장된 대통령 임기를 물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며 대놓고 ‘중평 반대’ 입장을 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통령 재신임 투표는 확실한 위헌 사항이 아니며, 김종필의 답변 회피를 위한 묘수(妙手)라는 지적도 나온다.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이기도 한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17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1987 개정) 헌법상에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와 관련된 기준이 없다”며 “대통령 본인 스스로가 신변 문제나 개인 사정으로, 또는 동력을 얻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는 것을 위헌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논란을 의식한 것인지 실제 김종필의 회고록에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의 위헌 및 적법성에 대한 주장이 적혀있지 않았다.
이들과는 달리, 오직 김영삼과 몇몇 재야 세력만이 시기를 놓치면 노태우 정부가 이를 영영 시행하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중간평가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다. 5공 비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상황이라 시기의 부적절함은 인정하지만, 대선 공약은 국민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야당과 협상할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1989년 1월 24일 상오, 나와 김대중, 김종필은 마포 가든호텔에서 신년 들어 처음 야3당 총재회담을 가졌다. 이 날 회담에서 밝힌 나의 입장을 의제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간평가 : 중간평가는 노대통령이 선거 막바지에 당선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내놓았던 대(對)국민 공약으로서, 야당이 요구한 것도 아닌 만큼 야당과 절충, 협상할 일이 아니다.
(중략) 노태우는 나와 만난 뒤 얼마 안 돼 중간평가 실시를 준비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신임과 연계하지 않은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실시하되, 이를 통해 5공청산 정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중간평가의 시기나 방법, 내용 등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가운데 야당과 정치적 절충을 통해서 처리해 나가겠다는 태도였다. 이는 ‘선(先) 5공청산과 신임연계 중간평가’라는 야3당의 기본합의를 흔들어 놓기 위한 술책이었다.
나는 노태우가 5공청산 없이 중간평가를 강행하겠다면 당연히 적극적인 불신임운동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노태우와의 정치협상을 거절했다. 이에 반해 김대중은 조기 중간평가에는 반대하면서도, 정치적 절충을 위해 청와대 영수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68~171페이지
이 같은 김영삼의 독자 노선은 노무현의 회고록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으로서 중간평가 실행을 고집하던 노무현은 저서에서 “통일민주당 내에서도 중간 평가를 반대하는 입장이 많았지만 김영삼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고 증언한다.
YS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적도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약속했던 중간 평가를 하겠다고 했을 때의 일이다.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야당이 집권당의 근본 문제까지 들고 나오면서 몰아붙이자, 노태우 대통령은 정면 대결로 나오면서 국면의 전환을 시도했다. 여당의 일방적인 청문회 불참을 선언하며 청문회를 파장으로 몰고 가면서 승부수로 중간 평가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자 막상 난처해진 것은 야당이었다. 입으로는 중간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통일민주당 내에서도 중간 평가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중간 평가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나는 YS를 직접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중간 평가는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중간 평가에서 이기면 총재님과 김대중 씨가 표로 대결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정국의 혼란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논리를 풀어 가는 게 어떻습니까?”
YS는 나의 말을 듣고 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당무 회의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총재실에서 불러 급히 달려갔더니, YS는 회의실로 함께 가자고 하면서 조그마한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노 의원이 나한테 했던 얘기 있지? 그걸 오늘 회의석상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해 주게나.”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YS의 침묵은 더 큰 차원에서의 설득과 승리를 위한 하나의 전술이었던 것이다.
- 노무현 고백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81~82페이지
김영삼의 ‘합의 불가, 조속 실행’ 입장은 ‘합의 가능, 일단 유보’를 주장한 김대중과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양김의 야권 통합 불발에서 시작된 갈등이 노태우의 중간평가 시행 여부로까지 번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측에서는 조속히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5공 비리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 평가를 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민정당에서 실시 의지를 나타낸 만큼 노 대통령에 대한 신임 문제를 놓고 투쟁하겠다”며 불신임 운동을 천명했다. 김영삼 총재와 민주당의 태도가 이상했다. 스스로 ‘5공 비리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 평가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두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중간 평가 이후 정계 개편이란 집권 여당의 노림수를 알면서도 이에 말려들고 있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50~551페이지
1989.03.04.
결국은 3김은 중간평가에 대한 입장 차이를 조율할 필요성을 느끼고 3자회담을 개최한다. 셋은 4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 모여 여권의 조기 중간평가 실시 방침에 따른 야권의 대책을 협의했다. 회담이 끝나고 이들이 낭독한 공동 작성 합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중간평가는 노태우 대통령이 약속한 신임국민투표 형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 시기는 5공 청산 및 민주화실천 등 국민이 평가할 만한 실적을 올린 이후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중간평가는 5공 청산과 민주화 실천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며, 국민에 대한 도전으로 용납될 수 없다. 중간평가를 강행한다면 야3당은 모든 민주국민과 결속해 노태우 정권의 불신임을 통한 퇴진을 위해 적극 투쟁할 것이다.”
결국 ‘선(先)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실시로 합의한 것이다.
회담이 끝나고 김대중은 언론에게 “당 공조 체제에 이상이 없어야 한다는데 유의하고 원만하게 얘기가 이뤄졌다”고 자평했다. 김영삼 역시 “5공 청산 없는 중간평가 강행할 경우 공동투쟁 벌이기로 합의가 잘 됐다”며 “현 상황으로 볼 때 세 사람이 공동으로 불신임투쟁을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여당과 정부의 입장은 확고했다. 민정당 박준규 대표는 이에 대해 “이르면 3월말, 늦어도 4월초에 투표를 하겠다”며 “중간평가 실시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등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5공 청산을 이유로 중간평가 연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5공청산은 별개의 문제”라며 선(先)중간평가, 후(後) 5공 청산을 고집하고 있었다.
1989.03.07.~1989.03.10.
“중간평가는 야당 총재와 회담한 후 결정하겠다”는 입장에 따라, 노태우는 3월 7일 김종필, 3월 10일 김대중을 각각 개별적으로 만났다. 다만 강경파인 김영삼은 제외된, 반쪽짜리 영수회담이었다.
그렇다면 개별 회담에서 무슨 대화들이 오갔을까.
화자는 단 둘, 기록에 따르자면 2시간 45분의 대화. 회담 직후 당시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은 “정국이 극한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정국 안정을 위해 대국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간 평가는) 공약 이행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등의 대화가 오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나, 실제 대화는 이와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종필은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을 주장했다. 이는 중간평가 공약과는 관계가 없으며, 심지어 중간평가를 제대로 실행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1989년 3월 7일 나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 다시 만났다. 배석자 없이 단 둘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 시간 가까이 회담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를 중지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으로 이렇게 말했다.
“북방정책을 포함한 여러 국정 과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여소야대 정국으로는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북방외교는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하기가 힘듭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나는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을 꺼냈다.
“공화당 35명이 민정당과 합치면 여소야대가 여대여소로 바뀝니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북방외교를 포함한 국방, 외교 정책을 소신껏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과 합칩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결심입니다.”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합당을 처음으로 제안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정치권의 거대하고 충격적인 변화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깜짝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좋습니다. 곧 합시다”라고 말했다. 서로 뜻이 잘 통했다. 청와대 회담을 마치고 국회 총재실로 돌아와 김용환 정책위의장을 따로 불렀다. 그에게 “우리 합치기로 했다”고 합당 추진 사실을 처음 알렸다.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50~151페이지
그리고 사흘이 지난 3월 10일, 이번엔 김대중과 노태우의 회담이 시작됐다. 공식 회담 기록은 공교롭게도 날짜와 같은 3시간 10분. 그러나 역사를 바꾼 3시간이기도 했다. 회담 이후 김대중이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통해 노태우의 재신임을 결정하자’는 입장을 전면 철회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날 회담 이후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하여 국민투표로 실시하는 것은 현행 헌법에 정신에 어긋난다”며 “중간평가를 실시하더라도 헌법에 부합돼야 하고, 정책 평가로 국한돼야 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또한 광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전두환, 최규하 전 대통령 등 책임 인사들의 인책 문제에 대해 가시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다. 물론 노태우는 여기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했다.
임기 첫해인 1988년, 노 정권은 서울올림픽에 매달렸고, 정국은 ‘제5공화국 정산’에 매진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노 대통령을 평가할 준거가 없었다. 나는 중간평가를 둘러싸고 정파 간 패싸움을 벌이는 소모전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노 대통령과의 담판이었다. 3월 10일 청와대에서 3시간가량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중간 평가를 신임과 연계시키지 않는, 단순 정책 평가로 실시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52페이지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서 김 총재가 중간평가를 할 것이냐고 물은 데 대해 나는 “국민들과의 약속이니까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김 총재는 “중간평가를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이전에는 중간평가에 대한 법률적 측면의 문제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국민 앞에 선서하는 첫째 항목이 헌법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기게 되는 셈이어서 나는 “검토해서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71~473페이지
1989.03.11.~1989.03.19.
소식을 들은 김영삼은 크게 분노한다. 불과 일주일 전에 문서화했던 야3당 총재의 중간평가 관련 합의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김영삼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통탄하며 김대중-노태우 합의의 이면에는 민정당-평민당 양당의 밀실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3월 10일, 노태우와 김대중 간의 청와대 영수회담은 중간평가 유보의 분수령이 됐다. 이 회담에서 김대중은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하지 않기로 노태우와 합의해 버린 것이다.
노태우는 이보다 3일 앞서 김종필과도 만나 비슷한 교감을 나누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노태우로서는 스스로의 대선(大選)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 부정직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김대중, 김종필의 경우, 새해 들어서만 세 사람이 두 차례나 모여 합의하고 또 국민 앞에 발표한 원칙을 뒤집어엎었다. 그것도 3월 4일의 야3당 총재회담으로부터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중간평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전후해서 정가(政街)에는 민정당과 평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정치설계를 협의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나는 이 구상이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소문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런 소문을 뒷받침하는 말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내각제개헌을 할 수도 있다.” “지방자치제 선거에 연합공천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연합공천에 앞서 사안에 따라 연대하고 정책연합도 할 수 있다”는 등의 말이 그것이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73페이지
한편 이 같은 의심에 대해 노태우는 “결코 없었던 일”이라며 “위헌이기 때문에 중단했을 뿐”이라고 전면 부인한다.
일부에서는 김대중 총재와의 묵계설(默契設)과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까지 오갔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김 총재 측에서 위헌(違憲)이라고 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뒷거래를 하겠는가.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73페이지
11일, 민주당은 긴급하게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10일의 ‘노·김 회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한다. 김영삼이 언론을 통해 발표한 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김대중의 회담은 국민을 배신한 행위이며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재신임과 관계없는 단순 여론조사 같은 중간평가를 하면 엄청난 비용만 들고, 국민에게 고통만 줄 뿐인데 왜 해야 합니까?
따라서 여권에서 중평을 단순 정책평가 형태로 진행하더라도, 우리 민주당은 노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퇴진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13일 강원도 태백시 국정보고대회를 시발(始發)로 전국 순회를 통해 불신임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판을 흔들고 싶은 제2야당의 의도”라며 냉소를 보낸다. 그는 도리어 중간평가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격화될 경우, 적잖은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김영삼의 대응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김영삼 총재와 민주당은 단순 정책 평가를 하더라도 노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과 퇴진 운동은 계속 전개하겠다고 했다. 하루는 외신 기자가 찾아와 내게 물었다. “통일민주당에서는 중간 평가를 위해 노 대통령이 물러나면 다시 선거를 하겠다는 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나는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다시 의견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당의 일각에서는 중간 평가를 통해 여소야대의 정국을 반전 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고, 제1야당 자리를 넘겨준 김영삼 씨로서는 판을 흔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했다. 비록 부정 선거가 있었고, 군부 독재의 잔여 세력이긴 했지만 직접 투표로 선출된 정권이었다. 중간 평가가 사실상 정권 퇴진 투쟁으로 비화되면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든, 물러나든 혼란이 일 것이고 그 부담은 국민들이 떠안아야 했다.
-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52페이지.
1989.03.20.
김영삼이 전국을 순회하며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그 날은 다가오고 말았다.
3월 20일 오전 9시 30분. 노태우는 TV 생중계를 통해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중간평가 실시 취소와 무제한 연기로, 김대중·김종필과 노태우의 합작이었다.
“이 시기에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나라와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간평가는 실시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는 그 시기와 방법 등을 신중히 재검토하여 반드시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결정할 것입니다.”
이날 노태우는 김영삼의 장외 투쟁 행위를 거듭 비판하며, 오히려 중간평가가 실시될 수 없는 배경으로 민주당의 과격한 투쟁 행위를 지목하기까지 했다.
“중간평가는 대통령인 나와 국민간의 약속을 실천하는 문제이므로 여야 간 다툼 대상이거나 국민을 가르는 대결의 불씨가 될 수 없으며, 야당 지도자들에게도 혼란 없이 엄정하게 실시될 수 있도록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국민투표가 공고도 되기 전에 정국은 대결과 격돌로 치닫고 있습니다. (중략) 특히 전환기적 현상으로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좌익폭력세력은 정권타도를 외치며 중간평가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는 발판으로 삼아 폭력과 파괴 행동을 격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와 같은 과열, 혼란상이 재연되려 하고 있고 돌멩이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세력과 최루탄으로 진압하는 대결 상황이 또 다시 빚어지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원만한 중간평가가 실시될 수 없습니다.”
이날 민주당은 즉각 논평을 통해 “그동안 중간평가 대상, 신임 연계 여부 및 실시 시기를 놓고 무원칙하고 기회주의적인 처사로 국민을 우롱한데 대해 노 정권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라며 언성을 높였다.
김영삼 역시 그날의 분통함을 자서전에 적어내렸다. 그는 “민정당과 평민당 양당을 불신하게 됐다”며 “민주당이 소외된 1김(金)3노(盧) 상황”이라는 심정을 기록했다.
그러나 중간평가를 피해 나가기로 방침을 정한 노태우는 나의 공세를 외면하고 김대중과의 협상을 계속했다. 노태우는 김대중과의 밀약을 통해 3월 20일 아침 중간평가 유보를 선언했다.
통일민주당은 21일 마포 가든호텔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 3.20 중간평가 유보담화를 대(對)국민 기만행위라고 규정한 뒤 노태우정권 타도를 선언하고 나섰다. 민정당과 평민당 양당을 불신하게 된 나는 당시의 정국상황을 ‘1노(盧)3김(金)’이 아닌 ‘1김(金)3노(盧)’라고 표현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편, 173~175페이지
반면 김종필은 “중간평가를 중지키로 한 것은 노 대통령의 현명하고 적절한 선택으로 환영할만한 결단”이라고 칭찬한다.
김대중 역시 긴급 당무 회의를 주재하고 중간평가 유보 결정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민주화를 바라는 다수국민의 승리로서 환영한다”며 “(중평 유보 결정은) 평민당이 중간 평가 정국에서 승리했다는 선언”이라고 기뻐한다.
나와 김영삼 총재는 결국 민심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야 했다.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이 중간 평가를 두고 장외 집회를 열었다. 우리는 중간 평가가 시기상조라는 것이고 저쪽은 강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3월 18일, 평민당은 경기도 부천에서, 민주당은 충남 온양에서 각각 장외 집회를 열었다. 청와대를 비롯해서 국민들과 정치권이 집회 상황을 주시했다. 나는 부천 시민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여권 내에서 요즘 중간 평가에 대통령 신임을 연계시키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또 저들은 중간 평가를 조기에 실시하여 국민 여러분이 만들어 준 여소야대 정국을 흔들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 평민당은 이 정권의 종식을 위해 모든 민주 세력과 함께 투쟁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중간 평가는 아직 때가 아닙니다. (중략)”
1만 명이 넘는 청중들은 박수와 환호로 답했다. 부천 집회의 열기로 중간 평가에 대한 나와 우리 당의 해법이 민심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통일민주당이 당력을 집중하여 개최한 온양 집회는 겨우 1000명 남짓 모였을 뿐이다. 그마저 중간에 이탈자가 속출하여 제대로 집회가 열리지 못했다.
이로써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졌다. 노 대통령은 부천 집회에서 중간 평가를 연기할 명분을 찾았고 자신감을 얻었다. 노 대통령은 3월 20일 중간 평가 유보를 천명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중간 평가 정국’은 소멸되었다. 이날 나는 당직자 회의에서 평민당이 중간 평가 정국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52-553페이지
기뻐하는 사람은 또 한명 있었다. 대통령 자리를 내놓게 된 위기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게 된 노태우였다. 그는 “지금 돌이켜봐도 잘한 결정”이라며 “중간평가가 없었기에 3당통합(민정당·민주당·공화당)이 있었던 것”이라고 후술한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봐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나의 결심이 당에 잘 전달되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중략) 중간평가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면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니 그것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아마 중간평가를 했으면 3당통합도 안되었을 것이다.
(중략) 이런 가운데 나는 3월20일 중간평가를 유보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 이유로 △중간평가에 대한 야당들의 견해 차 △대한변협의 ‘국민투표 방식의 중간평가는 위헌’이라는 견해 △좌익폭력 세력의 정권타도를 위한 폭력 파괴 행동 △정치적, 사회적 불안 가중과 경제위기 등을 들었는데 야3당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73페이지
그리고 노태우 임기 내내 중간평가 및 재신임 투표 여부는 두 번 다시 주요 안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노태우의 말을 따라 ‘임시’ 유보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정치권 바닥으로 가라앉고 만 것이다.
타협의 예술인가, 밀실 야합인가… “야합의 정치” vs “파기하는 용기도 정치”
중평 유보, YS 3당 합당의 토대… 1989년 3월은 역사적 분수령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8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승으로 잘 알려진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고백으로 한 뭉치의 비밀각서가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문서의 배경은 1989년 3월, 종이 안에는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대신 80년 광주항쟁 중 무력 진압을 시도한 정호용 등을 공직에서 사퇴시키자는 거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각서의 서명인은 여당인 민정당의 김윤환 총무와 제1야당 평민당의 김원기 총무였으며, 서명 일자는 1989년 3월 21일, 즉 노태우의 ‘중평 유보 선언’ 바로 다음날이었다.
세부적으로는 △전두환·최규하 전 대통령 국회 증언 △5공 핵심인사 정호용·이원조 사퇴 △5·18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제정 △지방자치제 올해 안 실시 등 평민당 측의 다양한 요구사항이 적혀 있었다. 반면 민정당의 조항은 단 하나였다.
“양당은 깊이 숙고한 끝에 현시점은 중간평가를 실시할 시기가 아니라는 데 합의한다.”
김영삼의 의구심대로 중간평가 유보 이면에는 김대중과 노태우의 밀실 협약이 확실하게 실재했던 셈이다.
‘3김’ 중 2김(김대중·김종필)이 웃고, 김영삼만 웃지 못했던 ‘노태우 중간평가 유보’ 사건. 앞서 언급했듯 위 사건은 ‘정치력의 올바른 예’로 언론에 종종 등장하곤 한다.
이와 관련해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1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역사적 사건이 시대에 따라 재조명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당시엔 이 사건은 밀실에서 권력자 단 둘이 만나 이뤄낸 ‘야합의 정치’ 일환으로 평가받았다”며 “그런데 지금 와서는 ‘소통의 정치’ 산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중평유보’ 사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사건은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다 지켜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문제”라며 다른 시점을 제시했다.
강 대표는 “지금까지도 선거 전략상 포퓰리즘 공약을 비롯해 검증 안 된 부분이 많이 포함된다. 집권하고 나서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철회할 줄 아는 것도 정치”라며 “실시간으로 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공약 시행의 유동성은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다만 국민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이런 과정 없이 마냥 파기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대중과 노태우의 협약은 ‘타협의 예술’인가, ‘밀실 야합’인가. 다시 판단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다만 선악(善惡) 또는 유불리(有不利)를 따져보기 전에, 1989년 3월의 역사적 의의를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앞선 정 평론가는 ‘중평유보 사건’의 중요성은 YS가 추진한 3당합당의 토대가 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위 사건은 야권통합을 위해서 민주당 입장에선 불리했던 소선거구제까지 받아들였던 YS가 DJ와의 야권 통합을 포기하게 만드는 계기”라며 “YS는 이날을 기점으로 DJ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 군부 잔여 세력인 노태우와 손잡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3당 합당을 하게 된 분수령도 바로 이 날”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가 유보되다 못해 영원히 종식된 과정에는, 헌정 상 최초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보통사람’을 외쳤던 노태우 대통령의 뚜렷한 한계와 3당 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 결과가 나타나게 됐다는 총론(叢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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