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재난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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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필담] 재난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 김병묵 기자
  • 승인 2020.03.22 2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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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핵심요소 부재…실제론 재난구호자금
'기본소득 논쟁' 왜곡·선거 前 포퓰리즘 우려 나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병묵 기자]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지난 19일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도내 중위소득 이하 가구 100%에 선별적 긴급재난소득 최대 50만원까지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지난 19일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도내 중위소득 이하 가구 100%에 선별적 긴급재난소득 최대 50만원까지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재난기본소득 이슈가 뜨겁다. 지난 2일 황교안 미래한국당 대표가 "재난기본소득 정도 과감성 있는 대책이어야 우리 경제에 특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이어, 6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한시적 재난기본소득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전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 100만 원씩을 일시적으로 지원하자고 제안하며 논의에 불이 붙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일 "(재난기본소득엔)동의하기 어렵다"고 선을 긋고,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도 12일 "현재 정부로선 (재난기본소득 도입) 계획이 없다"고 못박았음에도 좀처럼 지펴진 논란은 꺼질 줄 모른다. 미국 정부가 지난 18일 부자들을 제외하고 1인당 1천 달러씩, 우리 돈으로 백만 원 넘는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밝히면서 재점화됐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재난기본소득은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복지학자 리차드 카푸토 등은 기본소득의 핵심 요소로 △보편성(무조건성) △정기성 △개별성 △현금성 등을 꼽는다. 그러나 최근 이 지사나 김 지사 등이 제시한 재난기본소득에는 보편성과 정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이는 기본소득이라기 보다는 재난구호자금에 가깝다. 지난 13일 전북 전주시가 지급한 '전주형 재난기본소득 지원금'도 기준중위소득 80%이하에 해당하는 5만 명에게만 지급됐다. 다른 제도를 통해 지원받는 소상공인과 실업급여수급대상자도 제외됐다. 미국의 현금지급기준인 '부자를 제외하고' 역시 부자의 기준조차 모호한 상황이다.  

정치권에서 재난기본소득이란 용어를 사실상 제일 먼저 꺼냈던 황교안 미래한국당 대표가 22일 "지금 중요한 것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재난긴급구호 자금"이라며 "위기를 틈탄 선거용 포퓰리즘으로 이 사태를 호도해서는 안된다"고 입장을 재정립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왜 재난구호자금을 재난기본소득이라고 부르면 안될까.

둘을 엄밀히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아직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걸음마 단계인 우리 사회에서 재난기본소득이 진행될 경우엔 자칫 '잘못된 선례'로 남을수가 있어서다. 김용현 대구경북연구원 경제일자리연구실 연구위원은 22일 <대구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본소득 개념에 대한 틀이 아직 국내에 잡혀있지 않은데 이에 대한 선례를 남기면, 향후 자연재난 및 사회재난 발생시마다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재난구호자금을 기본소득의 핵심 요소인 현금성만 차용한 형태로 나눠주는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의 포퓰리즘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지난 20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일정 금액을 나눠주는 것은 '총선용 현금살포'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면서 "재정에 대한 장기적 고민 없이 선거만 이기고 보자는 발상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재난기본소득에 들어갈 예산은 약 51조 원으로 추산되는데, 현재 1차 추경 규모가 11조 원인  상황에서 이 규모는 향후 현실적으로 재원 확보가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여기에 더해, 애초에 한국의 사회적 토양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자체가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기본소득 도입은 한국의 기업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결과만 가져온다는 주장이다. 한국보다 노동유연성과 노동생산성이 훨씬 높은 나라들도 기본소득 도입을 고려하지 않거나, 관련 논쟁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명호 여시재 선임연구위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독일에선 딱 잘라 기본소득도입을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기본소득정책은 맨 나중에나 검토할 수 있는 최후의 정책"이라면서 "우리 사회는 순서가 바뀐 논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소득의 최대 목적 중 하나인 '중산층 확대'도 한국에선 실패할 확률이 높게 점쳐진다. 기본소득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의도와 다르게 중산층을 축소시켰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는 중이다. 유경준 노동경제학회장은 21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소득주도성장 정책은)정책의 긍정적인 면에만 집착하면서 부작용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며 "중산층 비중이 2018년 61.8%에서 지난해는 59.9%까지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볼 때 현 시점에서 경쟁적으로 정치권에서 제시하고 있는 '재난기본소득' 논쟁은 기본소득에 대한 진의도 왜곡하고, 오히려 포퓰리즘에 가까운 행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은 소득주도성장의 고전(苦戰)에서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재난기본소득 논쟁은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절실한 사안이다. 어찌보면 눈앞의 표를 쫓는 정치꾼과, 미래를 고민하는 지도자를 가르는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위기가 눈앞에 닥쳤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멀리 보는 리더십을 보고 싶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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