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용수 할머니는 왜 펑펑 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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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용수 할머니는 왜 펑펑 울었을까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0.05.26 2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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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엄과 공정의 문제로 보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대구에서 가진 2차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30년 동안 이용당해왔다고 말했다.ⓒ뉴시스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대구에서 가진 2차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30년 동안 이용당해왔다고 말했다.ⓒ뉴시스

 

이용수 할머니는 올해 아흔 세 살이다. 경북 성주군이 고향이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고명딸로 사랑받은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한 듯 보였다. 할머니가 일제 강점기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는 1944년, 고작해야 만 열네 살 때였다. 가미가제 특공대에 강제동원 돼 말로는 다 못할 고생을 겪었다. 지난 25일 기자회견에 따르면 일본군 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자 전기고문과 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머리를 질질 끌린 채 돌덩이보다 위험한 군홧발에 차여 배가 찢어질 만큼 죽도록 아팠다고 했다. 잘못한 거 없는데도 빌면서 살려 달라 했고, 한손씩 결박당한 채 머리와 귀에서 소리가 나며 엄마라고 크게 불렀던 순간이 여전히 기억난다고 했다. 

광복이 되고 할머니는 1946년이 돼서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기억조차 하기 싫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숨죽인 역사의 피해자로 지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1992년 6월 29일 수요 집회를 시작으로 용기를 내 당시의 참상과 인권 유린의 피해를 증언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 궁극적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실질적 문제 해결을 바라며 30년간을 인권운동가로 헌신해왔다. 그러기까지 함께 투쟁해온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라는 단체가 있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전신인 정대협은 90년부터 활동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 등을 위한 대표 시민단체다. 정대협, 정의연 모두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자가 이끌어왔다. 할머니에게는 윤 당선자를 비롯해 단체 주요 구성원 모두가 동고동락한 동지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처참하고 허망한 모습이다. 현재 할머니는 윤 당선자와 단체를 생각하며 몹시 분개하고 있다. 살 떨리는 목소리로 배신감을 느끼며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처음엔 기부금이 할머니들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는 것,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그 돈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로부터 받는 것이 미안했다는 것, 집회 때마다 학생들이 공부도 못한 채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수요 집회 무용론과 향후 운영 과정 및 투쟁 방식의 개선을 제기한 것이 주된 회견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양상은 예상 밖의 후폭풍과 배신감으로 휩싸여갔다는 주장이다.

자녀 유학비 출처 논란, 기부금 지출 내역 허위기재 및 자금 유용 의혹, 국세청 공시 누락 논란, 개인 계좌 모금 및 후원금 횡령 의혹, 회계 부실 논란, 가족 내부거래 의혹, 안성 쉼터 고가 매입 및 헐값 매각 의혹, 부친의 고용 논란, 아파트 구매 자금 출처 등 윤 당선인과 단체를 둘러싼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이다. 이것만도 놀라운데 할머니의 기억이 왜곡됐다고 폄훼되는 상황은 자다가도 일어나 가슴을 치는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차 기자회견 그날 할머니는 전날에야 깨달은 것이 있어 펑펑 울었다고 했다. 바보같이 여태까지 왜 말도 못했나, 스스로를 탓했다고 했다.

무엇일까. 정신대(근로정신대)와 위안부(성노예)는 다름에도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를 타이틀로 내건 단체가 무슨 권리로 위안부 문제를 제 편의대로 혼용해 사용했느냐. 일본이 배상 안 한 이유를 알았다, 사죄해라, 배상하라했지만 정대협에서 해당치도 않는 위안부 문제를 하는데 뭣 하러 그들이 사죄하고 배상하느냐, 왜 정대협 사업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두의 소처럼 섞어 팔아왔느냐, 왜 학생들 돼지 저금통 털어 나온 돈도 받아 챙겼느냐….할머니가 분통을 쏟아내며 열거한 것들이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였으리라 본다. 30년간 이용당해왔다고 생각하는 것, 처음엔 왜 모금하는지 몰랐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모금한 후에는 배고파 맛있는 밥 한 끼 사 달라 했지만, 얻어먹기조차 어려웠다는 것, 평소에는 들어주지도 않다가 밥 먹는 중 (위안부로 끌려가)어디 갔다 왔느냐 물어와 답했더니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출판돼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다는 것, 그래도 그런가보다, 당연한가보다, 했다는 것.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지나고 보니 한 줄에 구슬이 꿰이듯 훤해지며 뒤늦게 서야 이용당했구나란 생각에 할머니를 괴롭히고 말았다는 지적이었다.

결국 문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존엄성과 삶은 존중받지도 대접받지도 윤택하지도 못한 채 소외돼 온 것이 아니냐이다. 2015년 한일협정 관련해 10억 엔이 일본에서 들어왔음에도 할머니들은 처음엔 알지 못했다.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했다. 자신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 집회 나가고, 미국이 들어야 한다며 시키는 대로 성노예라 증언하고, 故김복동 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임에도 그 고생시켜가며 하더니 돌아온 것은 뭔가. 공정한 몫의 혜택은커녕 피해자들의 존엄과 아픔을 팔아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사리사욕 채우는 자가 따로 있었다는 것,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버느냐는 성토와 같이 착복은 엉뚱한데서 하고, 정작 주인공들인 할머니들은 빈손이었다는 것, 이것을 깨닫자 너무 원통하고 분해 펄펄 뛰고 펑펑 울고, 몸부림치고 만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다고 할머니는 말한 것이 아닐까.

정부에 등록된 207명의 위안부 할머니 중 남은 생존자는 겨우 18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시간이 없다', 할머니는 말했다. 먼저 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인 언니, 동생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날 때 이렇게 문제 해결하고 왔어, 말할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곪은 것이 터진 지금, 아직 늦지 않았다. 바로잡힐 게 바로잡혀 30년 단체 활동의 긍정은 남고 부정은 개선되길 바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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