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태서 ‘촛불혁명’으로…박근혜, 대통령 파면까지
6월 항쟁서 ‘6·29 선언’까지…‘민주화 투사’로 활동한 YS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정치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때로는 국민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기도, 가슴을 울리기도 하며 국민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정치인과 이를 바라보는 국민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황에 따라 결집해 커다란 사건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데요.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현장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를 주도한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등 야 3당은 그해 총선에서 되레 ‘탄핵 역풍’을 맞습니다.
2003년 47석으로 시작한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초기 예상을 뛰어넘는 152석을 얻으며 제1당으로 올라섭니다. 이 중 108명이 초선이었는데, 이들을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열풍을 업고 얼결에 국회의원이 돼 ‘탄돌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2016년 10월 최서원 게이트로부터 불거진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의 열기도 뜨거웠습니다. 같은 해 11월부터 점점 불어나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을 비롯한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도 이에 동참했습니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재석 299명 중 3분의 2 이상인 234명이 찬성표를 던져 가결됩니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가 이를 인용하며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파면됐습니다.
보수 진영은 당내 분열, 연이은 선거 패배로 한동안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 보수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2021년 4·7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부터입니다.
민주당이 지자체장의 성범죄, 조국 사태·인국공 사태 등에서 비롯된 불공정 문제, LH 직원 부동산 투기 사건, 부동산 실정 등으로 민심을 잃어갈 때, 2030세대 청년층, 그중에서도 남성들이 민주당에 돌아서며 국민의힘에 지지를 보여줬습니다.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한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이 2위 후보와 각각 18.32%, 28.25% 득표율 차로 당선됐는데, 출구조사에서 2030 남성들에게 특히 큰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이에 대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국민의힘 선거 전략은 60대 이상 전통 지지층에 2030세대 신 지지층을 결합한 세대 포위론”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이후 ‘청년 표심’이 줄곧 정치권 화두가 됐습니다.
취임 초 국민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7대 지방선거, 21대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20년 집권론’까지 자신했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20대 대선에서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위 사례들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들인데요. 과거 탁월한 정치 감각으로 민심을 읽고 변화의 기폭제가 된 행동에 나선 인물로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꼽을 수 있습니다. YS는 1987년 6월 29일, 군부정권으로부터 직선제 개헌 약속을 받아내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민주화 투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던 1987년의 일입니다. 전두환은 되레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내용의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해 반발을 샀습니다.
YS가 초대 총재로 있었던 통일민주당과 재야, 운동권 세력은 힘을 합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호헌 철폐’ ‘민주헌법쟁취’를 내세우며 군부 정권에 강경하게 투쟁했습니다.
대학가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던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상처를 입은 사실이 전해지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넥타이 부대까지 참여하는 등 항쟁의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습니다.
비상시국을 맞은 정부와 여당은 야권과의 협상을 적극적으로 모색합니다.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는 6월 24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영수회담 이후 “합의 사항이 없으니 분명히 결렬”이라고 선언하는데요. 민주당은 김대중에 대한 연금 해제 요구는 받아들여졌지만, 4·13 호헌 조치가 철회되지 않았기에 결렬됐다 보고 26일 국민대행진을 감행하겠다고 밝힙니다.
야권은 4·13 조치가 철회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수회담이 결렬됐다고 보고 26일로 예정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평화대행진의 원천 봉쇄 작전에 돌입했고 야권은 대행진의 세부 계획을 마련, 홍보하는 등 정국은 6·10 사태에 이어 또다시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 1987년 6월 25일 자 <동아일보> ‘대행진 강행 정국 긴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기관지 <민주통신>의 주간이기도 했던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은 2021년 10월 4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전두환이 내 말을 안 들었다’라는 뜻을 복잡하게 설명하는 대신 짧게 ‘결렬’이라고 하는데, 아주 쇼킹한 거다”라며 “그게 6월 항쟁의 폭발력을 만든 거다. 사람들이 ‘전두환이가 말이야. 회동하러 갔는데 잘해보지도 않고 판을 깼다’면서 비판을 해댔다. 그 덕에 6월 26일 국민대행진을 힘차게 강행할 수 있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날 대행진이 강행된 오후 6시가 되자 서울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도심 운행 차량 중 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렸고 학생·시민·당원들이 태극기와 흰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또 일부 성당·교회·사찰에서는 오후 6시 정각에 타종을 했다.
이날 서울 35개 대학을 비롯, 전국 69개 대학에서 1만4400여 명(경찰 집계)의 대학생들이 대행진 출정식을 가진 뒤 도심지에 나와 시민들과 합류, 가두 시위를 벌였다.
- 1987년 6월 27일 자<동아일보> ‘37개 시·읍서 대행진 공방…대도시 심야까지 격렬시위’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이자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6·29 선언’을 발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섭니다. 노태우는 ‘여야 합의 아래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 ‘새 헌법에 의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 등을 약속합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12일 <시사오늘>과의 대화에서 “민심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하게 돼 있다. 2016년 촛불 혁명이 그랬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에서도 비합리적이라 느낀 국민들의 마음이 선거를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사례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데, YS가 야당 대표로 대통령 직선제 쟁취에 앞장서는 과정에서 전두환과의 회담 이후 기자들 앞에서 ‘결렬’이란 두 글자를 뱉은 일도 있다. 국민은 분노했고, 군부 정권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4·7 재보선에서 보수가 집값 상승, 불공정 등으로 분노한 청년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선거 유세를 함께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민심의 폭발을 감지하고 이끄는 것이 꼭 좌파·진보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정 평론가는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 쇠고기 파동에서 비롯된 시위의 경우를 보면 가짜 뉴스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잘못 악용되선 안 된다”며 “최근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 집회가 만들어지고 이를 민심인 양 호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진영 결집을 위해 하는 일인지 진짜 국민을 위해 하는 일인지는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75년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시사오늘>은 20번째 주제로 국민 분노의 기폭제가된 정치적 사건을 살펴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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