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불견 모습 보이곤 ‘김포 대첩’이란다”
“곳곳에서 천박함, 억지스러움 판쳐”
“나라 품위 살려주는 선한 소수에 위안받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형석 논설위원)
요즈음 세태에서 품위나 품격을 따지는 건 자칫 허튼소리가 되기 십상이겠다. 정치권 인사들부터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촌 시대에서 최소한 ‘허접한 국가’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우리는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의 방문을 전후해 여지없이 무품격, 무례함, 심지어 ‘후진국스러움’의 민낯을 여지없이 세계무대에 드러내 보였다.
실은 그게 우리 본모습일지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반대 목소리는 당연히 낼 수 있다. 인접국으로서 내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다. 신랄하게 IAEA 검증의 허술함이나 편향성을 지적해야 한다. 날카로운 지적이나 과학적인 반론 제기는 어찌 보면 우리의 높은 수준을 IAEA를 비롯한 세계에 선보이며 만만치 않은 한국을 과시하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무리하지 않고 세련돼야 한다. 그러는 것이 설득력도 더 있다.
그로시 총장을 맞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행동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포공항에서 그의 동선을 가로막아 2시간에 걸쳐 화물용 통로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오게 한 순간부터 한국의 모습은 세계에 ‘미개국’으로 각인되기 시작했을 거다.
외신을 일일이 체크해 보지는 못했지만, 필자의 일선 기자 때 경험으로 미루어 그런 경우엔 사태의 본질보다는 시위대의 과격한 행동이나 그로시의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에 기사의 초점이 맞춰지기 십상이다. 자국 내의 이슈와 관련한 과격한 시위는 선진국에서도 흔한 모습이긴 하지만, 국제문제와 관련해 설득하러 들어오는 외빈을 맞는 반대 시위가 이렇게 야만스러워서는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민주당의 그로시 총장 공격 역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상실한 일본 편향적 검증” “일본 맞춤형 조사”라는 것까지야 충분한 근거자료가 뒷받침됐다면 타당한 지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염수가 안전하다면 음용수 등으로 쓰라고 일본 정부에 권고할 의사가 없느냐”라고 비꼰 지점에서부터는 이성적인 대화 상대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생수를 사 먹는 요즘 지구촌 세태에서, 그건 하수도 물을 퍼다가 음용수로 활용하라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수준의 억지다.
그로시 총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다가도 급기야 찡그리고 한숨을 내뱉는 시점에선 그가 이미 한국 국회의원을 내심 인정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로시 총장의 2박 3일 일정 내내 따라다니며 “그로시 고 홈”을 외쳐대며 몸싸움까지 시도했던 일부 시위대의 ‘열정’, 입국 방해 과정을 ‘김포 대첩’이라 자화자찬한 생각 없는 데모대, 광화문 숙소 앞에서 팻말을 흔들며 내내 시위를 벌인 단체들, 그들이 급기야 그로시 총장으로부터 “후쿠시마 오염수보다 북핵을 더 걱정하라”라는 역공을 끌어낸 장본인들이다. 그로시의 그런 역공도 이번 사안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을 들춰낸 다소 무리한 것이긴 했지만 외국에서 보기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얘기였을 수 있겠다.
그로시 방한을 계기로 드러난 과격하고도 끈질긴 시위의 모습, 면책특권을 등에 업은 국회의원들의 정제되지 않는 막말 발언 등은 사실 우리들에겐 익숙한 모습들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겐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이라는 인상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로시의 경우에서 새삼스레 품위를 생각하게 된 건 아니다.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K-컬처의 세계화로 나라 위상이 급부상했어도 내적으로는 곳곳에 천박함과 거짓이 판쳐 앞서 말한 대로 품위라는 단어를 언급하기조차 쑥스러워진 게 오늘 우리의 실상이다.
‘동방 예의지국’ ‘조용한 아침의 나라’ 같은 수식어는 전설이 된 지 오래다. 애써 그런 수식어를 되찾을 노력은 않더라도 최소한 ‘무례한 나라’ ‘시끄러운 나라’라는 불명예는 안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 나라를 찾은 외국 정상을 홀대하고, 외교관이 주재국에 대해 주제넘은 말이나 해대고, 국민들은 해외 관광지마다 단체로 몰려다니며 큰 소리로 떠드는 어느 나라를 닮아가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도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들
‘품위 제로 지대 된 나라’라는 이 칼럼 제목이 다소 과장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치권과 일부 막가파들에 의해 훼손될 대로 훼손된 국격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라의 품위를 지켜주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심장박동기를 달고 무대에 선다는 원로배우, 평생 고생하며 모아온 돈을 대학교에 기부하는 기부 천사, 막말이 난무하는 정치권에서 그래도 절제된 언어를 지키는 일부 정치인, 겸손한 스포츠 스타들과 케이팝 스타들. 명절 때마다 사재를 털어 불우이웃을 돕는 ‘키다리 아저씨’ 등등. 오는 추석에는 수십 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를 비롯해, 이곳저곳의 선행자들이 또 가난한 이웃 돕기에 나설 것이다.
그 옛날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은 전 재산 사회 환원을 통해 우리를 감동시켰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최근 유한양행은 국산 신약 31호 렉라자를 폐암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파격 기부하겠다고 밝혀 감동 스토리로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자식들에게 거대 기업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후 며칠 전 타계한 차수웅 우성해운 회장. 아버지 뜻을 따라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배우 차인표 형제들의 지나온 스토리도 훈훈하다.
차인표 씨가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천국에서 만나서 또 같이 걸어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어느 문학작품 이상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글 중간에 칼럼 제목을 ‘우리 국격을 지켜주는 선한 사람들’로 바꾸고 싶었을 정도다.
양평군민을 위해 그들도 그래 주었으면…
장대비가 내리다가 금세 무더위가 반복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그런 더위 속에서 지치지도 않고 이전투구를 계속하는 정치권의 악다구니가 서민들의 여름 나기를 더욱 피곤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요즘 가장 시끄러운 곳이 양평이다. 야당이 난데없이 대통령 처가 쪽 땅 특혜 의혹을 들고나오자, 여당은 민주당 소속인 전임 정동균 양평 군수 일가의 땅 특혜 의혹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그러더니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덜컥 사업 백지화를 발표해 양평군민들과 이웃 주민들을 허탈하게 했다.
위에 언급한 기부자들, 우리의 국격을 그나마 지탱해 주는 선한 그들은 김건희 여사와 전 양평 군수 쪽에 이런 속엣말을 하지나 않을까 싶다.
“양평군민들을 위해 그 땅을 나라에 기부하시죠!”
김형석(金亨錫) 논설위원은…
연합뉴스 지방1부, 사회부, 경제부, 주간부, 산업부, 전국부, 뉴미디어실 기자를 지냈다. 생활경제부장, 산업부장, 논설위원, 전략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경력으로 △2007년 말 창간한 신설 언론사 아주일보(현 아주경제) 편집총괄 전무 △광고대행사 KGT 회장 △물류회사 물류혁명 수석고문 △시설안전공단 사외이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외이사 △중앙언론사 전·현직 경제분야 논설위원 모임 ‘시장경제포럼’ 창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