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김영삼 댁이 어떻게 이렇게 쓸쓸할 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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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김영삼 댁이 어떻게 이렇게 쓸쓸할 수가 있는가?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2.2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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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제2의 정치 입문기-1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김영삼 댁을 위로 차 방문, 그리고 새로운 인연의 시작

또다시 총칼을 앞세워 전두환 정권이 탄생했고,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날도 우연히 상도동을 지나게 되었다.

막 연금을 해제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낙선자로서 우울하기도 해 김영삼께 위로의 말이라도 드려야 되겠다고 댁을 방문했다.

신민당 총재시절 그렇게도 방문객이 많아 미리 약속을 하고 가거나 아주 일찍 가도 보통 때는 독대는커녕 눈도장 찍기도 어려웠는데 그날은 응접실에 대기하는 이도 하나 없었다. 총재 혼자이고 보좌하는 사람도 장학노 혼자였다. 김영삼은 내가 왔다는 말에 곧바로 나와서 나의 낙선에 대한 위로의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서로 위로의 말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시국에 대한 걱정을 하고 내가 목장을 시작했다는 말을 하자 꼭 성공해 구경시켜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손을 잡고 종종 들러 달라는 부탁까지 하는 총재와 헤어져 나오면서 세상인심에 대한 각박함을 새삼 느꼈다.

지날 때 마다 꼭 들려달라는 총재의 힘없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왔다.

김영삼 댁이 어떻게 이렇게 쓸쓸할 수가 있는가? 너무도 서글펐다.

나는 김영삼 계보도 아니었지만, 나라도 총재를 종종 찾아 위로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목장으로 돌아 왔다.

그 후 얼마를 지나 또 상도동을 지나게 되어 찾아뵈었더니 그날 역시 혼자 계시다가 반갑게 맞으며 목장사업에 대한 말을 하면서 찾아온 것을 고마워했다.

“지난번에 노 국장이 다녀간 날, 내가 노 국장에게 주려고 글을 하나 썼다”고 하면서 누런 봉투에 들은 ‘민주광복(民主光復)’이라고 쓴 글을 내게 주셨다.

그러면서 요새 몇 사람이 등산을 하기 시작했는데 노 국장도 시간을 내서 참가했으면 어떻겠느냐며 등산을 권했다.

나는 그 글을 바로 표구를 하여 약국 안에 걸었다.

약국에 오는 사람마다 그 족자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서 어떤 사람은 “대단히 좋은 글을 걸었는데 이것이 진짜 김영삼 씨의 글이 맞느냐”고 하는가 하면, “저것을 약국에다 걸어 놓아도 문제가 없냐, 혹시 저것 때문에 약국 운영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좋은 게 좋지,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겁 없이 저런 족자를 걸어 놓느냐?”

또 어떤 사람은 “이집에 가보가 생겼네. 밤에 저거 훔치러 도둑이 들지도 모르니 여기다 걸어 놓지 말고 집 안방에다 걸어 놓으시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돈을 줄 터이니 저 글씨하나 얻어 주시오” 하며 가지각색의 비평이 따랐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일관되게 ‘민주 광복’은 우리 독립운동 선열들의 한결같은 요구요, 우리민족이 바라는 이 땅에서의 영원한 염원이라고 굳게 믿고 자랑스럽게 그 족자를 걸어 놓았다.

그리고 가끔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약국에 들러 아내와 나와 그 족자를 유심히 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웃기는 얘기다.

얼마 후 나는 도봉산으로 가는 산행에 참가해 제일 뒤에 쳐져서 산에 올랐다.

매주 목요일 10시에 모여 산행을 하는데 내가 나갔을 때는 약 20 여 명이 참가하고 있었고 산에 오르면 김영삼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고 하며 나라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김영삼과 민주산악회 회장인 이민우, 그리고 김동영 최형우 두 부회장과 문부식 김덕룡 최기선 홍인길 이계봉 박희부,  정채권 목사 등의 얼굴이 보였고 그 외에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모두 합쳐 20 여 명 정도가 산에 올라 애국가 합창과 기도, 묵념 등을 가졌다. 김영삼의 말씀과 회장인사 그리고 산이 떠나가라고 목청껏 “야호” 삼창을 했다.

각자 조그마한 버너를 가지고 와서 코펠에 밥을 짓고 김치, 양파, 호박과 고추장 된장 등을 섞어 돼지고기를 넣고 끓이면 맛있는 찌개가 됐다.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며 언론이 취급하지 않는 각종 국내외 뉴스들을 서로 아는 대로 전했다. 김영삼은 회원들이 식사하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안부도 묻고 격려도 하고 또 농담도 하며 우애를 다졌다.

또 어떤 때는 정채권 목사가 앞장서서 선도하고 기도도 총재대신 했다. 실제로 산행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산행을 했는데 나는 거를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정채권 목사가 다음 산행 때 기도를 부탁해 민주회복과 하루 속히 김영삼의 자유로운 정치복귀와 참가한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하나님께 빌었다.

김영삼 이민우 김의택 세 분의 오찬회동을 주선

전두환의 처, 삼촌 이규광의 처제 장영자 이철희 부부의 사상 최대의 어음 사기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를 둘러싸고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김의택 민권당 총재가 1차 연금에서 막 풀린 김영삼과 이민우 등 두 분과 오찬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1982년 초봄의 어느 날 나는 당시 종로예식장 앞에 있던 한식집 ‘경향(京鄕)’에 나의 이름으로 예약을 해놓고 세분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도 그냥 동석하라고 해서 했는데 서로 문안과 위로의 말씀을 나누고 김 총재의 붓글씨 쓰는 이야기를 잠시 나눈 후에 자연히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장영자의 어음 사기사건을 화제에 올리다가 이렇다 할 방안이나 무슨 합의도 없이 언젠가 또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다.

세 분이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인사동 골목으로 나오는데 언제 알았는지 정보부 서울분실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보더니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오늘의 회동을 “누가 주선 했느냐?”, “밥값은 누가 냈느냐?”, “셋이서 무슨 이야기들을 했느냐?”, “무슨 일을 하기로 했느냐?”, “또 언제 만나느냐?”며 꼬치꼬치 따지듯이 물었다.

“오늘 만남은 별것이 아니다, 내가 김의택 총재께 건의해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김영삼과 이민우 회장을 모시고 무료함을 달래고 위로차원의 순수한 오찬자리를 만든 것이다. 이야기도 붓글씨 이야기와 시국에 대한 걱정을 하는 차원에서 가볍게 나눈 것뿐이다. 당신들이 신경 쓸 만한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주산악회의 산행은 계속되었고 참가하는 인원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정보부와 경찰은 각 지역에서 산행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내 회유와 협박으로 산행을 방해했다.

한번 산행에 수백 명씩 참가하게 되니 국내 언론은 민주산악회에 관한 보도를 하지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파돼 외국 언론들은 이 기이한 산악회의 소식을 조금씩 보도하기 시작했다. 1982년 4월 16일자 뉴욕타임스는 헨리 스토크 동경 지국장이 구기동에서 출발해 남대문을 거쳐 우이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산행에 직접 동참했다. 산에서의 동정을 취재해 ‘정치활동이 금지된 한국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제목을 붙여 민주산악회를 대서특필해 전 세계에 알렸다.

이 기사로 민주산악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산악회로 알려지게 됐고, 아무리 정치규제법으로 묶어놓고 여당과 야당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간교하고 폭력적인 정치를 일삼아도 전두환은 국민의 자연 발생적인 민주주의에의 열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전두환 정권은 장영자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자 1982년 5월 31일자로 김영삼 총재를 다시 연금하기에 이른다.

이 2차 연금의 구실은 정치활동 규제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이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정치적인 회견을 해 이로 인해 연금을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나는 이 연금의 구실 중에는 앞서 말한 김영삼 이민우 김의택 세분의 비밀 만남도 한몫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전두환은 폭력으로 권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김영삼이 두려웠다. 김영삼의 움직임은 늘 전두환의 바늘방석이 되었다.

김영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전두환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그러다보니 연금이라는 치졸한 방법으로 김영삼 총재를 억압하며 스스로 쫓기는 정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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