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좋게 본 것은 오히려 이희호”
“김근 연합뉴스 사장 등…盧 적극 밀어”
“정치적 후계자로 찍은 인물은 한광옥”
“DJ는 항상 역사 의식, 승부 걸었던 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
시대산책 박지원 편
- DJ-동교동계 관계의 특징
- 박근혜 후계자설(說)의 진실
- 김중권과 노무현 지원 내막
- 마지막 비서실장 되기까지
- 1942년 6월 5일, 단국대, 전남 진도, 14대 전국구 입성, 민주당 수석부대변인, 국민회의 대변인,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대변인,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제2대 문화관광부 장관, 제25대 대통령비서실 실장, 18‧19‧20대(전남 목포), 민주당 원내대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국민의당 대표, 현 22대 국회의원(전남 해남군완도군진도군)
故(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은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이다.
권 전 의원은 국민의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지 않았다.
DJ는 대통령 임기 동안 다섯 명의 비서실장을 뒀다. 김중권 한광옥 이상주 전윤철 그리고 박지원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국회의원(이하 박지원)은 DJ 마지막 비서실장을 장식했다.
올해로 DJ 탄생 100주년의 해도 지나가고 있다. 국민의정부 기간 ‘DJ의 입’으로 불린 박지원을 만났다.
인터뷰는 11월 29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
이참에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DJ와의 인연
DJ 측근이던 김경재는 과거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망명 중인 DJ에게 박지원을 처음 소개해 줬다고 밝혔다. DJ와 박지원 인연의 연결고리인 셈.
- DJ와의 만남을 주선한 분이 김경재 전 의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박지원은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갔다.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을 거쳐 현지서 가발 공장 등을 운영했다.
“미국에서 뉴욕 한인회장, 미주 지역 한인총연합회장과 평통회장 등 감투라는 건 다 쓰고 있었어요.”
비교적 사업가로 성공하던 중이었다.
DJ를 만난 것은 83년.
“형님(박청원) 하고도 잘 알아서 찾아뵀어요. 전경환(전두환 동생) 당시 새마을 사무총장을 통해서요.”
-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바람이 있던 거죠?
“나는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당시는 DJ가 정치를 다시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때였어요. 계산하지 않았죠.”
원활한 사진 촬영을 위해 제스처를 요청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대변인 시절
- 평민당 시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만들어 가난한 당직자들의 밥값을 내준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무슨 카드를 만든 것은 아니고…. 당직자나 당원들이 굉장히 춥고 배고픈 시절 아니에요. 식사 같은 것을 많이 대접했죠. (정치인들이) 미국 연수를 오면 내 집에서 많이들 머물다 갔어요. 내가 살던 뉴저지 집이 컸어요.”
- 단기간에 DJ 신뢰를 많이 얻은 분이잖아요. 그 이유는 뭔가요.
“글쎄요. (DJ가) 나를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시켰고 수석부대변인을 맡으라고 했을 정도죠.”
박지원은 14대 전국구를 통해 첫 배지를 달았다. 1992년 민주당 때다.
“나는 사실 일기도 한 번 안 써봤어요. 아무 경험이 없는데 하라고 해요.”
나중엔 부대변인에서 대변인으로 올라왔다.
“그때는 DJ가 이기택 꼬마민주당 총재와 통합해서 대국민 접촉이 많았어요. 이기택계 장석화 의원이 대변인을 했지만 모든 기자의 취재 대상은 DJ였어요. 자동적으로 내가 대변인 역할을 맡게 됐죠.”
민주당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에서도 대변인을 지냈다.
“야당 사상 최장수인 4년 3개월을 맡았습니다.”
박지원은 국민의정부 출범 후 여당이 돼서도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야당의 입’에서 ‘DJ의 입’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 대변인을 하면서 나름 갖고 있던 원칙은 뭐였나요.
“나는 DJ가 대통령 되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확고한 신념으로 충성스럽게 잘 보필했어요. 혼을 바쳤어요. 굉장히 열심히 치열하게 했어요.”
오랜 기간 대변인으로 지내면서 정무 감각이 좋다는 평을 받았다. 야당 시절 새벽이 찾아오면 거의 빠지지 않고 DJ 자택부터 방문했다.
“DJ는 새벽 6시에 만나자고 하면 그걸 다 지켜요. 한번은 내가 6시 10분 전에 일산 자택을 갔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릴 거 아니에요. 소리가 안 들리면 전화가 와요.”
DJ : 어디요?
“아주 철저한 분이죠.”
만나서는 정국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나는 현상이 일어나면 ‘이 사태는 이렇게 처리하면 좋겠습니다’ 대안을 제시해요. 팩트만 보고하면 비서가 하는 일이 아니죠.”
국민회의 대변인 시절 논평을 통해서는 김영삼(YS) 문민정부를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평소 수첩을 빼곡히 적기로 유명했다.
- 기자들과도 재미난 일화가 많을 것 같아요.
“다 없어졌어요(?!) 다 술 먹고 노는 거죠 뭐.”
칸막이 스타일
심드렁한 틈을 타 화제를 돌리며,
- 궁금한 게 건강 비결이 어떻게 되나요. 너무 젊어 뵙니다.
“특별히 먹는 약은 없어요. 보약을 안 먹어요. 인삼이나 녹용도 체질에 안 맞아요. 비타민C 등을 열심히 먹어요. 잘 먹고 잘 자고 하루에 1만 5000보를 걸어요. 참지 않아요. 참으면 암 걸리니까.”
- 참모로서 참을 일들이 많을 텐데 DJ와 소통할 때는 그런 게 없었나 봐요.
“케미가 맞았으니까.”
-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박지원 등 모두 가신이나 참모들로 굉장히 유명한 분들이잖아요. 각자 스타일이 달랐을 텐데 DJ는 어떻게 일을 시키나요.
“DJ는 분업을 시켜요.”
일명 ‘칸막이 스타일.’
“내가 국정원장을 해보니 칸막이가 잘돼있어요. DJ 인사 스타일도 칸막이가 확실해요. 내용들을 서로 잘 몰라요. DJ만 아는 거죠.”
- 각자 맡은 파트는 뭐였나요.
“주로 권노갑 고문(민주당)은 정치자금 관계, 한광옥은 정치 협상, 한화갑은 조직, 김옥두는 경호를 맡았어요. 나는 한광옥을 도와 정치 협상 관계를 보조하면서 언론 그리고 DJ와 동교동의 신변 문제를 책임지고 있었죠.”
일단 “정무 파트는 한광옥, 박지원이 했다고 보면 된다”고 부연했다.
-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관련 한광옥 전 대표(새천년민주당)가 실무를 맡아 성사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도 물밑에서 역할을 했나요.
“네 그렇죠. 한광옥이 김용환 부총리(JP측 협상 책임자)와 협상을 하면 나는 밤중에 신당동 JP 자택을 찾아 의견을 물었어요. 한광옥이 표면적으로 나설 때도 DJ는 반드시 나한테 또 한 번 확인해요. 정황을 다 파악했어요.”
이런 DJ 특성에 대해 그는 “탄압을 받아본 정치인이기 때문”이라고 봤다.
“비선을 두고 또 한 번 돌다리도 두드려가면서 걸어요. 신중한 분이죠.”
박근혜 지원설
- 한화갑 전 대표에 따르면 DJ가 대통령 시절 국민 통합을 위해 ‘박근혜’를 키우려 했다는데 들은 바 있나요.
“그때 조그만 당대표(미래연합)로 있었는데….”
한화갑은 본지 인터뷰에서 “DJ가 ‘대통령이 돼서도 국민 통합을 이룩할 수 없다. 나의 최대 정적이었던 박정희의 딸을 정치 지도자로 키워낸다면 국민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했다”며 자신을 비롯해 권노갑, 김윤환 등에게 ‘박근혜 키우기’를 주문했다고 한 바 있다.
박지원은 ‘DJ가 박근혜를 영남 대통령으로 밀려고 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듣기론 DJ가 박근혜를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나중에 박근혜가 아버지(박정희)를 대신해 사과한다고 하니까 DJ가 굉장히 당혹스러웠다는 거 아니에요.”
2004년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DJ를 만나 “아버지 시대 때 있었던 고초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했다. DJ는 회고록에서 당시에 대해 “참 고마웠다”고 기억했다.
DJ가 ‘칸막이 정치’를 했다면 분업이 확실했을 터였다. ‘박근혜 키우기’ 구상에 대해 한화갑, 허주 등은 알았어도 박지원은 몰랐을 수 있다.
동교동계 일부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 이들에게는 영호남 통합을 숙원한 DJ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DJ 부인 이희호 여사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박지원의 발언은 또 다른 면을 가늠케 했다.
“오히려 이희호 여사가 ‘우리나라에도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는 바람으로 박근혜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어요.”
- 정균환 전 사무총장(국민회의) 말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DJ와 같이 하는 조건으로 통일부 장관직을 요구했는데 잘 안 됐다고 합니다. 들은 적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자기들 선에서 그러한 아이디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DJ가 알았다면 나도 들었을 거예요.”
정균환은 2002년경 당시 미래연합 대표이던 박근혜를 만나 ‘함께 정치를 하자’는 DJ 바람을 전했다고 본지에 말해왔다.
박지원은 DJ가 몰랐을 것으로 짐작했지만 ‘정균환 증언’은 다르다. 그는 “어른(DJ)께 보고했는데 좀 고민을 해보자”고 했다는 것. 고심하다 흐지부지된 듯 보였다.
박지원은 “DJ가 알았더라면 ‘박근혜 요구’를 들어줬을 것”이라고 했다.
- 왜 그랬다고 보나요.
“박근혜 당시 대표가 6·15 남북 정상회담 후 평양을 갔잖아요. 김정일과 2세들이 잘해보자는 얘기를 했지요. 심지어 상암경기장에서 남북축구대회가 열렸을 땐 ‘한반도기를 들기로 했는데 왜 태극기를 들고 응원을 하냐’며 정몽준 축구협회장을 항의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김중권 지원설
- 김중권 초대 비서실장은 DJ가 ‘영남 대통령’으로 본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동교동계에서는 소위 김중권 정무수석(노태우 정부 때)을 굉장히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초대 비서실장 김중권, 초대 국정원장 이종찬 모두 민정당 출신이거든요. 두 분 다 국민의정부 출범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동교동계에서 볼 때 ‘이건 너무하다’ 싶었던 거죠. DJ는 우리가 동진정책을 써야 된다고 봤어요. 선두에 김중권 실장이 있었어요. 당대표(민주당)로도 보냈죠.”
- ‘김중권=포스트 DJ’론에 본인도 공감했나요.
“나는 공감했어요.”
- 김중권 실장이 구로을(2001년 보궐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을 때 반대한 것은 아닌가 봐요?
“(김중권) 고향이 경북 울진이니 거기서 국회의원이 돼야만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다고 본 거죠.”
민주당 소속으로 영남에서 당선돼 살아 돌아온다면 DJ가 미는 ‘영남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논리였다.
동교동계와 DJ
- 청와대 있을 때 동교동계와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사실상 그런 거죠. DJ는 동교동계를 굉장히 중시하면서도 가신들을 옆에 두고 쓰지는 않아요. 대신 위기가 오면 불러들여요. 투쟁력, 지혜가 좋잖아요. 충성심도 있고요. 그렇지만 해결하고 나면 일단 좀 떼 놔요. 변두리를 돌게 해요.”
마치 “자전하고 공전하듯” 한다고 표현했다.
“DJ는 당선된 뒤에도 동교동 가신들과 빈번히 접촉을 하지 않았어요. 김옥두 이런 분들만 비교적 청와대에 자주 들어왔죠. 나만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꼭 옆에 있었어요. 내가 할 수밖에 없었죠. 동교동 가신들로부터 ‘대학에서 노인 심리학을 전공해 아부를 잘 한다’ 등 모략도 많이 받았어요. 아부는 한두 달 못 간다고 변명도 해봤지만….”
- 동교동계에서는 서운했을 듯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나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 뿐 그것이 내 ‘말’은 아니잖아요. 그분들이야 대통령을 겨냥하기는 곤란하더라도 나를 비난하기는 쉽잖아요. 이런 건 감수를 해야죠. 지금 윤석열 대통령 문제가 그거 아닙니까? 소위 총대를 메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 그때 그 역할을 했었군요.
“나는 그렇게 자부해요. 지금까지도 ‘김대중 하면 박지원’, ‘박지원 하면 김대중’을 생각 사람들이 많잖아요.”
노무현 지원설
국민의정부 시절 광주 조직을 책임지고 있던 이는 박광태 전 광주시장이다.
그는 2022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6대 대선을 앞두고 “DJ는 노무현”이라는 박지원 전갈을 들었다고 했다.
이에 전략적으로 ‘盧’를 밀게 됐고 그것 때문에 판이 확 바뀌었다는 것.
실제 노무현은 완전국민경선으로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광주에서의 돌풍을 기폭제로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본선에 올랐다.
- DJ가 노무현을 민다고 말한 게 맞나요.
“….”
긍정으로 들렸다.
- 박광태 전 시장은 원래 이인제 전 의원을 밀려고 했다고 하던데요.
“권노갑 고문이 동교동계 좌장이잖아요. 그분이 이인제를 지지했죠.”
뒤이어 박지원은 권노갑의 말을 전해왔다.
권노갑 : (박지원에게) 박 실장, 너 (DJ) 대통령 끝나면 뭐 할래. 이인제 대통령, 권노갑 총재, 박지원 국회의원. 이렇게 셋이 하자.
박지원 : 형님. 저는 하지 않습니다. 형님도 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 모시고 나가서 동교동에서 삽시다.
“그것 때문에 나랑 많이 싸우고 틀어졌죠.”
이인제 영입과 참여정부
- 이인제가 아닌 노무현을 민 이유가 대권구도에서 영남 출신이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나요.
“그게 아니고….”
박지원은 97 대선 이후의 이인제 영입 일화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인제가 국민신당 대표로 있을 때 DJ가 나한테 영입하라고 했어요.”
둘은 팔레스호텔에서 만났다. 호텔 바를 애용했다.
박지원은 이인제한테 “대선에서 500만 표를 받았으니 대통령 후보로 인정을 받은 것”이라는 DJ 말을 전했다. 아울러 “지식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도 지적하며 “민주당에 와서 일을 도모해라. 4년간 의정활동에 집중하면서 국회도서관에서 공부하라”는 대통령 제안을 전했다.
“이인제는 입당 조건으로 이만섭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이후 권노갑 고문의 지지를 받게 된 거죠.”
- 권노갑 고문은 DJ는 무심이라고 했습니다.(그는 2022년 본지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중립이었고, 나는 첫 번째 이인제, 그다음엔 노무현”이라고 했다.)
“아니. DJ는 노무현이었어요. DJ가 노무현 후보를 선정하게 된 것은 연합뉴스 김근, KBS 박권상 사장이 내게 계속 얘기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민주당의 정체성을 이어갈 사람은 노무현이다” 했다고 한다.
- 정체성은 뭘 말하나요.
“민주당 정체성은 대북, 노동, 복지 등에서 나타나잖아요.”
박지원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김근 사장을 대통령과 만나게 했어요. 왜 노무현인지 설명하라고도 했었죠. 그런데 김 사장이 대통령이 식사 후에 아무런 언급도 안 하더래요.”
걱정된 김근, 박지원에게.
김근 : 노무현은 이제 끝난 것 아니오?
박지원 : 끝난 게 아니오. 이미 당신을 만난 것은 또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노무현을 받아들인 거요.
“노무현이 제주, 울산 경선에서 좋은 성적을 못 냈을 때 내가 비서실장 아니에요. 박광태 시장한테 연락을 했죠.”
박지원 : (박광태에게) 광주에서 노무현 바람을 일으켜야 해요.
“노무현 바람을 캠프에서도 노력한 것도 있겠지만 박광태 시장이 대단한 정치력을 가진 사람이에요. 광주에서 3선 국회의원, 시장을 했기 때문에 지역 정치판을 잘 이끌어요. 거기서 확 붐을 일으켰죠.”
박광태는 당시를 생각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은 바 있다. 그는 본지와 만났을 때 “(참여정부 때) 동교동계 수난시대였잖습니까. 대통령 만들어 놓응께~제일 먼저 동교동계를 잡아넣었어요. 나도 징역 갔어요. 권노갑·박지원 전부 다…”라고 말하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박지원도 대북송금 특검으로 수사를 받았다.
“내가 구속되니까 박광태 시장이 광주에서 기자들을 불러 놓고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이 박지원을 구속하느냐. 누구 때문에 대통령 됐느냐’면서 박지원이 노무현을 밀라고 한 얘기를 기자들한테 전했어요.”
‘박지원의 공로로 노무현이 당선됐다’고 폭로한 것.
“비서실장으로 선거에 개입하면 안 되잖아요. 공소시효가 살아있을 때였거든요. 내가 절대 알려지면 안 된다면서 막았어요. 주간지 한 군데 정도에만 실리다가 안 나왔어요.”
그러면서도 어쨌거나 ‘박지원 때문에 노무현이 대통령 됐다’는 박광태 발언은 맞는 말이라고 보태왔다.
“실제로 나한테 그런 공로가 있죠.”
토사구팽 당한 것에 원망은 없을까.
“그 사람들(참여정부 인사들)이 잘못했지 (노무현이 대통령 된 것은) 국가로 봐서 민주당으로서도 잘 된 거죠.”
마지막 비서실장
-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배경은 뭐였나요.
“대통령은 처음부터 나를 ‘하반기 비서실장’으로 생각한 것 같아요. 청와대 공보수석 2년 하고 문체부 장관하다 비서실장해야 하니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박지원은 한광옥을 추천했다.
박지원 : 비서실장은 한광옥이 적임자입니다.
“한광옥은 절대 비서실장으로 안 오려고 했어요. 자기는 정치를 계속한다고 했지만 DJ한테 설득당해 (박지원이 장관으로 가 있는 동안 비서실장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한광옥은 나 때문에 희생당한 케이스에요. DJ는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를 한광옥으로 생각했어요. 한광옥이 (비서실장을 하다가) 당대표 할 때 내가 비서실장으로 내정됐는데 <한겨레신문>에 나버렸어요. 정동영 김한길이 거의 다 흘려줘버린 거죠. 마지막 비서실장은 순장조로 가는 거죠.”
- 다른 분들 얘기 들어봐도 DJ가 한광옥 대표를 많이 신뢰했다고 하더라고요.
“성실하잖아요. 잘하고.”
- 국민의정부 기간 동교동계 권력이 권노갑에서 박지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말들이 있었다던데요.
“지금도 동교동계 권력은 권노갑입니다. 제일 큰 형님은 권노갑 고문이잖아요. 나한테 (권력이) 넘어왔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요. 난 잘 (권노갑을) 모셔요.”
일각에서는 박지원을 두고 동교동계다, 아니다 등 평가가 다르게 나오기도 했다. 본인 생각은 어떨까.
“동교동계 가신들은 자기들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해요.”
가신하면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등 3인방이 꼽힌다.
“가신 모임이 있어도 한광옥 박지원 박광태 박양수 이런 사람들은 안 끼워줘요. 우리끼리 놀았어요.”
- DJ 관련 재미난 일화 좀 부탁합니다.
“많아요. 그냥 ‘얘기하지 않는 것’이 일화입니다.”
작가 이상은 ‘비밀’은 재산이라고 했다. 그 말이 생각났다. 추후 회고록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거기에 보물단지를 풀려는 듯 말을 아끼는 모습.
얼추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박지원은 의정 활동 외에도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쁘다. 만난 날도 주말에 지역을 돌아본 뒤 국회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 종합적으로 DJ는 어떤 지도자인지와 가장 중요하게 꼽는 성과가 있다면요.
“항상 역사와 승부를 걸어요. 역사를 의식하고 국민을 위하는 지도자였죠. (업적은) 아무래도 6·15 남북정상회담 아니겠어요?”
- 얼마 전 YS 서거 9주기였습니다. YS는 DJ가 단일화 및 합당 약속을 깨버린 이후 불신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얘긴 안 할게요. 내가 YS 얘기를 나쁘게 하겠어요. 좋게 하겠어요. 그런 건 죽으면서 (회고록서) 써야지.”
- 새미래민주당은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DJ당이 아니라고 합니다.(이낙연계와 반이재명계 인사들이 만든 새민주당에서 전병헌 대표는 최근 민추협 행사에 참석해서도 현 민주당은 DJ 정신이 사라졌다고 일갈했다.)
“그것도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박지원은 빨리 끝내자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쫓기듯 나왔다.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