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수양 엄마는 무당이다.
내가 수양 엄마의 법당을 가기 시작한 것은 여주에 살던 때부터 약 15년 정도 된다. 막내로 아들을 낳은 나는 아이가 다섯 살쯤 됐을 무렵 수양 엄마 법당에 아들 이름을 걸고 수양(收養)을 맺은 것이다.
엄격히 따지자면 아이들의 수양 엄마다. 그런데 달리 부를 명칭이 없어서 그냥 발음 나는 대로 ‘슁-엄마’ ‘슁-엄마’라고 불렀다.
‘슁-엄마’는 나보다 4살이 많다. 한 가지 석연한 것은 ‘슁-엄마’네 법당에는 간판이 없어서 좀 허전하다는 것이다. ‘슁-엄마’는 가난하다. 법당을 운영하면서도 신자가 별로 없다.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집 안 된다.
‘슁-엄마’는 술이 엄청 세고 담배도 엄청 피운다. 술고래에 골초라는 것이 솔직히 고와 보이지는 않는다. 무당이라는 신분이 공인까지는 아니어도 신자들을 품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리 아름다운 모양새로 여겨지진 않았다.
‘슁-엄마’의 남편, 즉 ‘슁-아버지’의 직업은 고물장수였다. 여주읍내에 살 때 ‘슁-아버지’는 경운기에 약간의 그릇들을 싣고 촌부락을 돌았다. 돈도 받고 고물이나 곡식도 받으면서 장사를 했는데 역시 ‘슁-아버지’도 술과 담배가 셌다.
이들 부부 사이는 별로 다정하지 않았다. ‘슁-아버지’는 자주 장사 나가는 일을 쉬었고, ‘슁-엄마’는 그럴 때마다 이웃에다 남편이 게으르다며 힘껏 흉을 봤다. ‘슁-엄마’는 가정의 가난한 경제사정을 모두 남편의 무능으로 돌렸다.
특히 법당의 행사가 있는 날에는 준비할 돈이 없다며 ‘슁-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나는 의심이 갔다. ‘법당의 모든 경제는 법당에서 해결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그렇게 여주읍에서 이웃을 하고 한 십 년 살았는데 어느 날 보니 ‘슁-엄마’네가 온데간 데없이 이사를 갔다.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고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설공주’로 이사를 오고 보니 ‘슁-엄마’네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인연은 기막힌 인연이었다. 나는 다시 ‘슁-엄마’네 법당을 가기로 했다. 법당에는 아직도 내가 사다준 놋쇠로 된 동그란 종이 불당 앞에 매달려 있었다. 그 종에는 내 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는 “슁-엄마, 슁-엄마”라고 하면서 자주 왔다 갔다 했다. ‘슁-엄마는 가끔 “선희(큰딸) 엄마야”하면서 우리 집을 들락댔다.
그런데 한 가지 설공주 동네에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나도 어느 할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슁-엄마’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슁-아버지’가 ‘슁-엄마’를 끌고 뒷동산으로 올라가 어느 산소 잔디밭에서 자기 발로 밟아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나도 참 팔자가 기막히다. 허구 많은 점집 중에 하필이면 술고래에다 골초에다가 불륜까지 저지르는 무당한테 목숨을 걸고 복을 빌러 다닌다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 집을 건너뛰고 다른 점집을 다닌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딴에 나는 의리가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일은 오히려 ‘슁-엄마’ 쪽에서 터졌다. 왠지 모르게 내게 보내는 시선이 쌩하니 쌀쌀맞았고 마음의 간격이 크게 넓어진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슁-엄마’가 그러니, 나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언제 시간을 내어 조용히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일요일이라서 마침 집에서 쉬게 되었다. 나는 한가한 시간에 ‘슁-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마침 받았다.
나는 조용조용 말했다.
“‘슁-엄마’한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이따가 간매리 다방으로 오후 3시까지 나오세요.” 라고 말하자 쉉엄마는 따지지도 않고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설공주 동네는 이렇게 작아도 면소재지라서 위로 가면 큰 동네에 다방이 한 군데 있다. 나는 찻값을 챙겨서는 오후 3시까지 다방으로 갔다. ‘슁-엄마’도 뒤따라 들어왔다. 우리는 찻잔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이렇게 다방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슁-엄마’, 어쩐지 요즘 ‘슁-엄마’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쌀쌀맞으신 것 같아서요. 무슨 이유인지 말씀을 들어보려고 이리로 오시라고 했어요.”
말을 마치고 나는 다방 안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손님은 없었다. 한참 바쁜 농번기라서 손님이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아냐, 내가 왜 선희 엄마한테 쌀쌀하게 해..... 아냐 나 그런 적 없어.....”
‘슁-엄마’는 변명을 하면서 어느새 담배를 한 개비를 꼬나 물었다.
“아니 그럼 내가 ‘슁-엄마’를 오해했단 말이에요? 나 그런 바보 아니에요. 하실 말씀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나는 다그치듯 말했다.
“아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알다시피 선희 엄마 생전 남의 말 안하고 점잖은 것 다 아는데... 나 정말 선희 엄마한테 할 말 없어...”
‘슁-엄마’는 정색을 하면서 부인했다. 구태여 아니라고 발버둥 치는 대야 나도 방법이 없어서 우리는 찻잔을 비우고 바로 일어나 다방을 나왔다.
오후가 무르익는 가을 정점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설공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나와 ‘슁-엄마’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슁-엄마’는 뭔가를 감추고 있는데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집 문턱에서 헤어졌고, ‘슁-엄마’는 댁으로 갔다. 우리 집으로부터 약 70미터 떨어진 산 밑에 있는 집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일요일이었고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왔다. 나는 늦가을에 입을 식구들의 옷을 정리하면서 방에 있었다. 그때 밖에서 갑자기 쨍그렁-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나가 봤다. 방문 앞 콘크리트 위로 ‘슁-엄마’네 불당 앞에 매달려 있어야 할 그 옛날 내가 준 놋쇠 종이 입술이 깨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 집 봉당에 패대기치고 가버린 이는 ‘슁-아빠’였다. 그는 부리나케 마당을 가로질러 울타리 밖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난데없이 수양을 파기하는 증표를 메어꽂다시피 하고 간단 말인가?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더라도 진위를 파악한 다음 결정해도 될 일을 앞뒤 알아보지도 않고 왜들 이러나 싶었다. 그나저나 수양의 증표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떼어다가 내 집 앞에 패대기쳤으니 내 원망은 하지 못하겠지.....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내심 좋게 보지 않았던 터라 애달플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도 모르고 당하니 곰곰이 따져봐야 했다. 그러다 한 가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슁-엄마’의 불륜 사실을 귀띔해준 할망구가 분명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을 것 같았다. 동네방네 이간질쟁이일 수 있다.
나는 모두 잊기로 했다. 이듬해 여름, ‘슁-아버지’는 뜻밖의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슁-엄마’는 마음 놓고 불륜을 저질러도 될 것 같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오래전 설공주라는 동네에서 살던 때의 경험담이며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8세 할머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