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배척과 대립의 검은 정치문화는 이제 극복돼야 한다. 화합과 소통, 일치와 단결의 사회문화를 선도하는 자양분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 '인간과 사랑'을 중시하는, 5천년 우리 겨례의 민족기상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자리해야만 한다.
최근의 정치세태는 참으로 터무니없다. ‘배신’을 밥먹듯 하고, 걸핏하면 극한 대립으로 치닫거나 무력 충돌까지 보인다.
사안의 실질적 핵심을 외면한채 온갖 명분을 동원하여 국민 피로도를 고착시켜 가고있는 여야간의 ‘극한쟁투’ 정치문화는 말할것도 없다. 각 정당 내부의 행사도 걸핏하면 정치인 개인들간의 정치생명 경쟁 때문에 ‘폐습과 파행’으로 치닫기 일쑤다.
‘인간’도 없고, 도무지 서로가 서로를 이롭게 해야한다는 ‘홍익인간’ 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대의(大義)’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각론과 ‘세론(細論)’을 놓고 죽기 살기식으로 다툰다. ‘공동선’ 보다는 ‘개인주의’가 격화일로다. 아직도 이러고 있다.
멀리 갈것도 없다. 지난 7월의 집권여당 전당대회는 참으로 점입가경에 목불인견이었다. 진흙탕 싸움을 벌인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들 행태가 그러했다. 총선에 대패했으면, 자숙과 함께 당정 관계나 당의 미래 비전 같은 생산적 공방을 벌여야 함에도, 상대 깎아내리기와 의혹 제기 공방만 국민들 기억에 새겨져 있다.
후보 간 명품백 사과와 관련한 김건희 문자 공개에 대해 ‘배신의 정치’니 하며 친윤, 친한 계파싸움이 불거졌고, 연판장 소동에 대통령실 개입 논란과 음모론까지 횡행하지 않았던가. 이런 여당 전당대회는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행태다. 불신은 만병의 근원이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니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참으로 가식적다. 기본적으로 ‘인간 개조(改造)’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힐 풍경이라고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판이다. 그 기원은 오래됐다.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인권(人權)’을 함부로 다루는, 민족정기 유린과 경시의 정신자세는 역사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였으나, 현대사만 보더라도 한국정치의 체질적 타성과 폐습이 날이 갈수록 굳어져온 결과이다. 시대적 대의(大義)보다는, 언제나 정치인 개인의 ‘권력 지상주의’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한민족 전체적으로 보면, 북한은 볼것도 없다. 3대째 ‘권력 지상주의’ 세습체제를 이끌어왔다. 곧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남한 내부의 타성도 시대사적으로,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로 문제 투성이다.
오랜 세월 한국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온 양대 축(軸) YS(김영삼)와 DJ(김대중) 두 지도자 관계에 얽힌 상세사(詳細史)는 이를 상징한다. 정치적 大義와 권력게임에 얽힌 한국 정치의 폐습을 적나라하게 함축한다. 필자의 취재 노트를 토대로, 그 실상과 교훈을 다시 정리한다.
YS는 항상 시대적 大義를 준거틀로 놓고 DJ와의 관계를 설정해 나가려 했으나, DJ는 언제나 자신의 '권력 지분'을 우선 순위로 놓고 YS에 대한 ‘융합과 배신’을 저울질하려 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매우 다르다. 그 ‘증거의 역사’는 이렇다.
이승만 독재의 사사오입 개헌 이후 YS는 자유당 인사 10명과 함께 탈당했다. 1955년 4월에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YS는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조병옥과 유진산이 이끌던 민주당 구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5.16 반란이 일어났을 때 YS는 거제도에 있었고, 바로 상경했다. 반란 직후 박정희 정권로부터 공화당 창당이나 군정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완강하게 거부했다. 1963년 3월 박정희 군정 연장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1969년 6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강도높게 비판하던 YS는 집 근처에서 괴한들이 초산이 든 병을 승용차에 던지는 테러를 당했다. YS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공화당이 단독으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YS는 젊은 지도자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1970년 9월 29일 YS를 비롯한 DJ, 이철승 등의 40대 젊은 정치인들이 대선후보 경선을 치렀다. 1차 투표에서는 YS가 1위를 차지했으나 YS-DJ의 2차 투표에서는 DJ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YS는 신민당을 탈당하지 않고, 유세 과정에서 '김대중의 승리는 곧 자신의 승리'라고 역설했다. 大義에 입각, DJ를 끝까지 밀었다. 그러나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DJ는 95만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을 일으켰을 때 YS는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박정희의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YS는 바로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YS는 가택연금됐다.
YS는 1973년 DJ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어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1974년에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로 선출됐다. YS는 DJ의 정치활동 보장을 요구하고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했다. 끝까지 DJ와의 義理를 지켰다. 이때문에 개헌을 거론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됐다.
1979년 8월 YH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YS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가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단독으로 YS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가결했다. 이때 YS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말했다. YS가 제명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같은해 10월 박정희가 피살되며 유신정권은 끝났다.
1980년 신군부의 ‘5.17조치’로 YS는 서울 상도동에서 가택연금됐다. 이듬해 5월 가택연금이 풀리자 주변 야당 동지들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조직, 고문으로 추대됐다. 1983년 5월 18일 YS는 야당인사 석방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의 출국 권유에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거절했다. YS는 1984년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198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은 1985년 12대 총선에서 야당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이 됐다. 당시 야권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자, YS는 뜻을 같이한 DJ 함께 탈당하여 통일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자 당시 대권가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YS는 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DJ는 이에 반발, 탈당을 결심한다. 오랜 세월 DJ의 민주화 투쟁 大義를 한결같이 믿고 지원하려 했던 YS의 의리(義理)를 적전(敵前)의 결정적 고비에서 배신했다. YS와 DJ의 후보 단일화는 그렇게 결렬됐고, DJ는 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대선에는 노태우(민정당), 김종필(공화당)까지 출마해 ‘1노3김’의 대결이 펼쳐졌다. YS는 DJ의 출마로 인해 2위(28%)로 낙선하고 말았다. 끝내 단일화 불발과 막판의 KAL858기 폭파 북풍이 불면서 노태우가 당선됐다. YS의 민주화 정권 투쟁 大義는 DJ의 막판 배신으로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바꿔말해, YS와 DJ는 이미 일찍이 단일화 경험이 있었다. 박정희에 맞서면서 단일화를 했는데, 이 때는 DJ로 단일화를 했었고, YS는 DJ를 밀었다. 자연히 이번에는 DJ 측이 양보를 해서 YS로 단일화하는 것이 순리였다. 따라서, DJ 측이 욕심을 버리고 이번에는 YS에게 양보를 해서 박정희 때 빚을 갚아야 했다.
더욱이 당시 YS 측이 지지율이 더 높았고, 단일화란 지지율이 높은 후보를 중심으로 이념이 비슷한 후보끼리 뭉치는 것이기에 DJ 측이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DJ는 탈당과 분열을 결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 대선이 끝나고 개표 결과에서도 YS 측이 DJ 측보다 23만표가 더 나왔다.
YS의 민주당은 1988년 4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DJ의 평민당에 이어 제2야당으로 전락했다.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에서에서 3당 합당을 추진했다. YS는 보궐선거 과정에서 상대 후보 매수건으로 오른팔인 서석재가 구속되는 등 어려워지자 전격적으로 3당 합당에 합의했다. 당내 반발이 심했으나 결국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이 새로운 보수 대연합당인 민자당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大義를 향한 불가피한 전술이었다.
국회 격돌 부른 양김 대립구도
3당통합 후 YS와 DJ의 관계는 더 점입가경이다. 그 치열성을 당시 필자의 취재노트는 이렇게 적고있다.
“3당통합 후 YS와 DJ의 관계는 해묵은 경쟁의식과 적대관계로 변모한다.”
YS는 DJ에 대해 ‘당을 깨고 나가 야권분열을 초래한 이중적 정치인’이라는 불신을 거두지 못한 반면, DJ는 YS에 대해 '야당에서 여당으로 변신한 정치인'으로 규정, 팽팽한 감정적 대립을 보이는 지경으로 치닫게 되었다.
따라서 3당통합 후 회기 초반부터 여야간의 극한대립으로 점철된 13대 국회의 파행운영은 한마디로 YS와 DJ의 치열한 승부수를 정면으로 표출시킨 상징적 ‘사건’으로 지목된다.
국군조직법, 광주보상법. 방송관계법 등 여야간에 첨예한 이견들이 계속돼온 쟁점법안들을 놓고 민자당의 일방처리 강행과 평민당의 실력저지가 맞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파행상을 연출했다. 13대 국회는 YS가 3당통합 이후 거대 여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서 당과 의회운영의 책임을 맡은 후 그의 국정 주도 능력을 테스트하는 첫 무대였다는 점에서 회기 초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YS로서는 3당통합 직후 열린 90년 2월의 임시국회가 통합공방에 따른 정치논쟁으로 민생현안 등이 뒤로 밀린채 여론의 지탄을 받았던 점을 감안할 때, 이번만은 야당에 밀리지만 않는 ‘책임있는’ 여당상을 보여주기위해 상당한 각오를 했던것으로 측근들은 전했다.
제150회 임시국회 종반전에 들어가면서 문공위에서 방송법 상정문제를 놓고 민자당 소속 최재욱 의원이 평민당 김영진 의원이 던진 명패에 맞아 부상당하는 등 불상사가 잇따르자 YS 비서실의 강.온파 참모들간에 구여권식 강행이냐, 아니면 협상을 워한 냉각기를 갖느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결국 자체 투표까지 붙인 결과, ‘강행’의 결론을 내리고 의견을 수렴, YS에게 건의하는 진통까지 치렀던 점은 그 국회에 임하는 YS 진영의 고충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민자당이 수차례의 여야 격돌과 국회 파행상의 노정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마지막 날 26개 쟁점 법안을 변칙적인 방법으로 날치기 처리하는 등 강공을 계속한 ‘실체적 배경’은 무엇이었던가.
이 국회의 파행상에 관해 YS를 비롯한 민자당내 민주계와 DJ측은 상호 실랄한 어조로, 상대방 지도자의 개인적 야심으로 인해 국회가 전례없는 파행상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며 격렬한 대립구도를 보여주었다.
YS의 측근들은 ‘이번 국회의 파행화는 전적으로 DJ의 개인적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DJ가 법안심의나 민생문제 보다는 국회를 3당통합 이후 추락한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정치의 장으로 활용, 일그러진 국회상이 국민에게 부각되도록 원내 전략을 진두 지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같은 DJ의 계획은 특히 야권 통합 문제로 당 내부 또는 야권 내부에서 점차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자신과 평민당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1차적으로 평민당이 반대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위력을 가시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서 ‘이는 곧 13대 국회의 해산과 조기총선을 통해 평민당의 위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기본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민자당의 김동영 총무는 한마디로 ‘평민당이 근본적으로 국회를 무용화시키겠다는 전략으로 나오는 이상, 어떻게 협상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법안 처리 강행의 책임은 전적으로 DJ의 정치적 복선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평민당과 DJ측의 반론과 주장도 이에 못지 않을 만큼 강경했다.
DJ 측근들은 이 국회의 파행이 YS를 중심으로 김동영 총무, 그리고 본회의 마지막날 26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한 김재광 부회장 등이 모두 민자당내 민주계임을 들어, YS가 이 국회를 계기로 당내 계파간 투쟁에서 정치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자신과 민주계의 입지를 확보하는 독무대로 삼으려 했다는 논리를 폈다.
국회 침몰과 민자 계파간 시각 충돌
그러나, 그 국회에 임했던 민자당 내부 사정은 달랐다. 한국 정치 술수와 협잡의 수준이 과연 어느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회기 중반 문공위 폭력사태가 발생한 직후 긴급 소집된 민자당 의총에서는 폭력을 행사한 평민당 김영진 의원의 징계문제를 둘러싸고 민정계와 민주계간에 현격한 시각차가 노출됐다.
이 자리에서 민정계 의원들은 한결같이 김의원에 대한 징계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최고의 중징계인 제명 및 형사처벌 등 강경론을 폈다. 황명수, 황낙주, 신상우 의원 등 민주계 중진들은 당지도부의 강경제재 방침에 반해 정국의 파국을 막기위한 보다 ‘신중한 징계’를 요구, 민정계 의원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황낙주 의원 같은 이는 타 계파 의원들로 부터 항의를 받자 토론할 분위기가 안된다며 의총 현장에서 퇴장해 버리기도 했고, 이에 대해 민정계 의원들은 '정치쇼'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같은 계파간의 입장 노출과 관련, 정가에서는 이 국회의 파행은 그동안 내각제 개헌 문제에 대해 평민당과 묵시적 교감을 해온 박철언 의원 등 민자당내 민정계 일부 세력이 13대 국회상의 ‘침몰’에 평민당과 함께 동참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조기총선과 내각제 협상을 유도하려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DJ와 적대감정 속에 있고, 개헌 문제에 대해 당내에서 가장 부정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YS와 민주계를 거세해 나가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내재돼 있다는 주장이었다.
한마디로 원내전략의 집행과정에서는 관망하던 민정계가 사태가 터지자 오히려 초강경의 분위기를 촉발시켜 13대 국회 무용론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하려 했다는 진단이었다.
결국 150회 국회의 파행상은 원초적으로는 1노2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간의 정치적 입장차이로 인해 민자당내 계파간 이해타산과 여야간의 정략적 의도가 얽혀들면서 악화일로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는 관측으로 집약됐다.
그 후 정국은 평민·민주당 등 야권의 의원직 사퇴파문을 몰고 오면서, 경색 일변도로 치달았고, 방송법 개정에 따른 방송계 노조와 재야, 학생권 등의 반발기류가 더욱 거세져 보수와 진보세력간, 또는 영호남간 지역감정의 갈등이 더욱 높아지고 말았다.
결국 합당정국의 무기력과 힘의 남용을 동시에 보여준 13대 국회는 야야를 마주 달리는 기관차의 궤도위에 올려놓은 형국이 됐으며, 치유하기 힘든 갈등의 ‘골’을 깊게 판것처럼 보였다. 한국정치의 생생한 아귀다툼 현장실상과 체형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후배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라겠는가.
처음부터 뒤틀린 大義 ‘弘益人間’
민족과 국민적 大義를 생각하는 정기는 실종되어 있었다. 타협과 양보를 배척하고 모두가 작은 술수와 정략에 집착하는 정치문화가 일상화돼 있었다. 더 위로 거슬러 오르면, 민족정기란 가장 큰 大義는 대한민국 초반부터 아예 뒤틀려 있었다. 그러니, 현재까지도 온통 혼란과 배신, 대립과 충돌일 뿐임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실상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 국민들의 열망에 따라 친일파를 처단하는 ‘반민특위’라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긴 했다. 활동기간은 2년으로 정했고, 활동이 시작되자 노덕술, 이광수 등의 친일파들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실효는 얼마가지 못했다. 무뢰배들이 반민특위에 상해를 가하는 등 방해가 시작되는데,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를 두둔하고 나섰고, 반민특위의 활동 기간을 1년으로 줄여버렸다.
결국 잡아들인 친일파들은 단 한명도 처벌을 받지 않고 전부 풀려났으며, 친일파는 오히려 주요 요직을 차지한 후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왜 친일파를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국민의 열망과는 달리 정부의 의지가 없었던 데다 미군정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어 이념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심지어 한반도는 당시 소련과 미국 냉전시대의 격전지였다.
북한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역할을 했다. 때문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고, 철도도 잘 놓여져 있었다. 그에 반해 남한지역은 상대적으로 농업지역이 많았다. 더욱이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경제규모가 우위에 있었다. 대한민국은 60년대까지 북한보다 못 살았다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문제는 여기서 남한이 따로 정부를 세웠으니 북한에 뒤지지 않도록 국가를 제대로 운영해야 되는데, 실질적으로 그러한 인재들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가 워낙에 길었던 탓에 기술이나 지식을 가진 이들은 전부 친일파였던 것이 현실이었다. 상대적으로 친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탄압받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등용해서 주요 요직에 앉히기 시작했다. 이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이 북한과 소련의 힘에 밀리지 않게 한 것이 큰 이유였다. 결국 친일을 했던 인물들이 상당수가 주요 자리에 앉아 출세를 하기 시작했고, 당시 친일파들은 우익의 가면을 쓰고 좌파간첩, 이른바 빨갱이들을 때려잡으며 영웅으로 떠오르는 현상들까지 벌어졌다.
한국전쟁과 수많은 남북한간의 갈등을 지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좌파, 즉 빨갱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고, 친일파들은 그들에게 가려져 살아남게 됐다. 그 영향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우파=친일파’라는 인식도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해방 후 ‘역사’를 길게보고 ‘중심’을 확고히 잡았어야 했다. 친일파는 민족정기의 관점에서 국가대의상 뿌리채 처단돼야 옳았다. 그러나, 이미 당시의 집권층은 그런 정신각오도 실질적인 능력도 와해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정의(正義)’는 사실상 죽었다. 정의부터 바로잡고 ‘홍익인간’의 민족혼으로 가야 마땅했음에도 실정은 그러했다.
다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에 관한 논란도 민족정기의 관점에서는 문제 투성이다. 경제를 살린 공이 있고, 독재를 한 과가 있다. 정확히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것이 박정희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당시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미 이뤄낸 공적에 대해서는 그에 부합한 영광을 치하하는 것이 당연하다.
허나, 그 과정의 당위성이 문제다. 박정희 정치는 ‘인간’의 근본을 잃었다.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죄 없는 위인들을 형장의 이슬로 보냈고, 20년 동안 독재를 하며 국민들의 ‘인권’을 무차별 탄압하고 유린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한것은 그의 공이지만, 과정에서의 옳지 않음은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그것은 우리의 민족정기인 ‘홍익인간’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고 그를 위인이라고 치하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정의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에 박정희 같은 사람이 위인이 되면, 후세대에 모든 사람들이 경제를 위해서는 독재를 일삼을 수 있고, 사람을 죽일 수 있고, 헌법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항상 민족정기의 ‘홍익인간’ 大義를 무엇보다 제대로 새겨 가야만 한다. 원칙이 흔들리고 균열하면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길게 보장되지 못한다.
우리가 일본에 강조하는 것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사회의 정의를 찾고, 민주주의를 찾고,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면 문제를 똑바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홍익인간’ 정기를 제대로 국가사회 곳곳에서 일으켜 가야만 한다.
무엇보다 ‘정치’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것은 진실한 ‘민족 사랑’이어야만 한다. 거듭 말해, 북한은 곧 와해 침몰한다. 교착되고 찢어진 ‘한(恨)의 역사’는 청산돼야 마땅하다. 우리 민족의 잘못된 생각과 습관은 너무 오래됐다.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 필자가 항상 강조해온 ‘민족개조’는 이뤄져야 한다.
<다음은 정당문화편 이어집니다.>
이병도의 '민족개조론'을 확인하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이병도의 민족개조론’ ☞시사오늘(시사ON) - admin (sisaon.co.kr)
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하였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하였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YS 대권전쟁>,<최후의 승자>,<영원한 승부사>,<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 평소 민족주의와 역사주의를 기준으로한 집필경향을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