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 기자)
냉철히 따져 본다면 한국의 재난영화가 비중 있는 장르의 입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한 세월은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다.
우선적으로 다소 질 낮은 CG 의 표현력을 빌리고, 그 안에 드라마와 멜로는 물론 코미디까지 녹여 내다 못해 한국의 유서 깊은 신파 구조를 첨언했던 <해운대> 는 비록 <투모로우> 와 같은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의 아류일 뿐이지만, 본격적인 한국형 재난영화의 서막을 열었다는 데엔 부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2009년에 개봉한 <해운대> 를 필두로 지난 몇 년 동안 자가 분열과 복제를 거치며 어느새 한국영화의 무시 못 할 대세로 떠오른 재난영화 장르의 현시성이 우리에게 유독 남달리 다가오는 이유는 과거 고도의 압축 성장 기조 속에 이행되었던 밀집된 산업화라는 대한민국의 엄연한 역사성과 한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절대 지워질 수 없는 과거의 병영국가 시스템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국민총화(國民總和) 라는 희대의 멋들어진 단어까지 창출해 내며 한국형 재난영화 못지않은 단기간의 눈부신 성장과 개발을 일구어왔지만, 그 기저에는 비이성과 불합리 속에 내재된 지극히 한국적인 몰상식과 비리의 서사가 점철되어 있다.
일세를 풍미했던‘한국병’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우리의 지난한 단면을 피력하기에도 용이했던 이 재난영화 장르에는 국내외를 통틀어 대개 전형적인 공식이 존재한다.
상술한 <해운대> 에서 보듯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인물들 간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갈등 관계가 기본 서사로 자리 잡고, 그렇게 켜켜이 쌓여진 뼈대 위에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인간 군상들이 주인공들과 격렬하게 충돌하며 균열을 일으킨다.
영화의 도입부터 조금씩 선보이기 시작하는 예정된 재난의 조짐들은 플롯이 흘러 갈수록 중후반부터 현실화되어, 종국에는 평범하지만 용감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모인 주변인들의 숱한 희생과 회한 끝에 갈등이 봉합되고 새로운 국면의 준비를 다짐한다.
여기에 강렬한 사회 고발과 비판은 영화의 부가적인 메시지다.
아직 한 달이 남아 있지만 2016년을 되돌아보자면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다 못해 현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지러운 현 시국을 방증하듯, 재난영화 장르는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지배해 왔다.
그렇게 무난히도 덥고 지쳤던 여름날의 바이러스를 싣고 <부산행> 을 외치며 출발했던 재난 열차는 막막했던 <터널> 을 지나, 마침내 도착지에서 원자로라는 <판도라> 의 상자가 열리는 것을 목도하며 짧지 않은 여정을 매조지할 성싶다.
새로이 개봉하는 <판도라> 의 각본과 연출을 책임진 박정우 감독은 드라마와 멜로, 코미디 등 숱한 장르를 넘나들며 시나리오를 집필한 내공의 소유자답게, 이미 전작 <연가시> 를 통해 한국형 재난영화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가능성을 표출한 충무로의 대표적 실력파 작가다.
재난영화의 상투적인 기본 공식이 늘 작동하듯, 그의 영화 또한 가족애와 아비규환 속의 몹신(mob scene) 이 주요장치이자 기제로 활용되며, <판도라> 에서도 이 전가의 보도들은 여전히 발효된다. (여기에 의도치 않은 신묘한 시의성까지 발휘된다.)
그러나 각본을 직접 집필한 감독의 취지와는 달리 <판도라> 는 배우들의 대사에서 원전 시스템에 대한 세심한 소개가 차용되듯, 사고에 대한 경각심 고취의 의지가 지나쳐 한 편의 재난영화라기보다는 마치 일개 시민단체가 만든 원전사고 대책 홍보영화를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 영화 내내 원전 시스템과 사고 등에 대한 용어를 친절히(?) 설명하는 배우들의 딕션은 대사라기보다는 보는 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강의를 하는 듯하고, 이는 재난영화의 기본 얼개인 주요 인물들 간의 갈등 구조조차 부자연스러운 연기의 분진 속에 매몰되게 만든다.
고발과 비판의 메시지라는 아무리 옳은 알맹이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싸고 있는 외피가 부실하다면 영화의 설득력은 감쇄되는 법이다.
고도의 성장기를 지배해 왔던 한국 사회의 안전 불감증만큼이나, 그간 농축되어 온 한국영화의 성과를 맛본 국내 관객들의 눈높이 또한 웬만한 CG 나 내러티브의 자극에는 둔감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판도라> 의 엔딩을 수놓는 장중한 배경음악처럼 영화의 서사가 너무나 길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다.
그만큼 펼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연출의 욕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와 같이 그동안 한국 영화를 식상하게 향유했던 모든 요소를 최소화시키고 이를 함축할 줄 아는 것도 감독의 역량이다.
차라리 주연을 맡은 맹목적인 고군분투의 김남길 보다는 조연의 정진영과 특별출연한 김명민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점이 이 영화의 특성을 명증한다.
특히 국무총리의 카리스마에 휘둘리는 유약한 젊은 대통령 역을 맡은 김명민의 모습에서 우리의 현재를 보는 듯한 쓴웃음이 감도는 것은 몇몇 개인의 지나친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이 나라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일갈하는 총리의 모습은 사고는 정부가 쳐놓고 수습은 늘 국민이 한다는 대사에 응축되었듯, 자신들의 책임은 방기한 채 항상 국민만 피해를 보게 하는 이 나라의 한심한 위정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매서운 부메랑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모티브가 생성되었을 <판도라> 는 화려한 CG 속에 펼쳐지는 가족애와 인간애, 그리고 경제논리에 천착하는 무사 안일의 관료주의를 시현하는 재난영화 본래의 장르성이 아니라, 근래의 세월호 사건과 경주 지진에서처럼 국민을 보호하는 신뢰성이 결여된 채 늘 좌고우면하는 한국적 정치사회 시스템과 절묘하게 맞물릴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되어 이제는 무감각해지는 정부 시스템의 무능함에 얹혀 울려 퍼질 <판도라> 의 공명에서는 일말의 자괴감마저 든다.
결국 <해운대> 로 시작하여 <아마겟돈> 으로 끝나는 이 한 편의 영화는 4년 전부터 써내려 간 시나리오의 한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사이에 등장했던 여느 재난 블록버스터의 공식에서 한 치의 진일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영화 문법 이전에 우리의 재난 컨트롤 타워는 그 4년 전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이 오히려 퇴보 중인 것을.
그래서 더 안타깝고 먹먹하다.
12월 7일 개봉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
·영화 저널리스트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