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김영삼은 대통령 자리에 올라 박정희의 군사통치 32년의 긴 세월동안 어질러진 부정부패와 독재적 군사문화의 적폐를 털어내고 선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임기 5년은 너무 짧았다.
김영삼은 일제 36년에 버금가는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합법적인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됐다
김영삼은 당당한 대통령이었기에 박정희가 쓰던 총칼의 힘도, 부당한 돈도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당당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의 밀실과 부도덕의 산실인 안가의 철거, 부정부패의 원천인 박정희 집무실의 대형금고 철거, 박정희가 사병화한 군의 암 덩어리인 하나회의 해체, 박정희가 없앴던 지방자치를 32년 만에 부활, 철저한 의회주의의 부활, 민주주의의 기본인 공명선거의 정착 등, 늘 정의의 편에 서서 일해 왔다.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고문하던 일제의 헌병대와 경찰처럼 박정희에 반대하는 민주인사들을 억압하고 고문하며 온갖 불법을 자행하던 중앙정보부의 잘못된 기능을 없애고, 검찰 경찰 법원의 기능을 민주질서에 맞도록 원상 복구시켰다. 그중에도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차단, 모범을 보이며 실천한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전격실시’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향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가 정착되도록 모든 제도적 기초를 확립했다.
과대 포장된 박정희는 끝내야하고 제2의, 제3의 김영삼이 나와야한다
김영삼은 건국 이래 순수한 애국심과 지성(至誠)으로 미국의 조지 워싱턴처럼 선진민주주의의 미래를 활짝 열어놓고도, 잘못 알려지고 과대 포장된 박정희와 군사독재권력이 32년 동안 저지른 실상을 잘 모르는 국민들로부터, 응분의 존경과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 나라의 역사와 후손들을 위해 불행한 일이다.
선진국이 되려면 제2의, 제3의 김영삼이 나와야 한다. 많은 국민들이 김영삼은 누구보다도 깨끗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음 몇 가지를 들어 김영삼의 정당한 평가에 인색하다.
① IMF
②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 실패의 책임
③ 3당 합당
IMF: 미국의 금융위기를, 당시의 대통령 부시와는 반대당인 오바마 현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권과 국민, 어느 언론도 “부시가 나라를 망친 대통령”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가적 위난인 IMF같은 엄청난 사태를 “나는 잘했는데 대통령인 김영삼이 나라를 망쳤다”고 김영삼에게 책임과 원망을 퍼붓는데 정치권도 언론도 국민도 한덩어리가 됐다.
군사독재 32년동안 저질러진 부정부패 부조리가 만든 한국병의 표출이고, 그들이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나라와 국민을 담보로 퍼오고 퍼주고 인심 쓰고 한 금융질서의 파괴로 IMF사태는 오게 돼 있었고 또 와야만 새로운 미래를 열게 돼 있었는데, 박정희를 비롯한 집권세력과 정치권 그리고 국민도 옷깃을 여미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 같이 참회해도 모자랄 판에, 군사 통치로 고질화 한 한국병을 근본적으로 제도적으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미구에 나라가 거덜 나겠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이를 악물고 본인의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권력을 이용해 기업인뿐 아니라 어떤 돈도 불법적인 돈은 10원도 받지 않겠다고 한 취임식 때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당당한 모습으로 퇴임해 상도동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 고고하게 살고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칭찬과 박수를 쳐서 후세에 알려야할 역사적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김영삼이 잘못했다”고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부에 안주한 정치권과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국민도 “나의 잘못된 생각과 욕심이 IMF를 불렀다”, “내가 잘못했다”고 뼈저리게 뉘우쳐야 우리는 복을 받을 것이다.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 실패의 책임: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총칼로 겁주고, 부당하게 만든 돈을 뿌려 입을 막고, 불법무법으로 독재정치를 할 때,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그들의 폭압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할 때 민주화의 지도자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늘 순수하고 민주적 원리에 충실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해서는 목숨은 물론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각오로 앞장서서 싸웠지만, 김대중은 민주화투쟁의 대열에 있으면서도 민주화 보다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한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우선하여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오면 그때마다 본색을 드러내 본인의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민이 피땀 흘려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의 기회를 반납하고 말았다.
김대중은 사후에 발간한 자서전에서 “후보단일화는 이뤄졌어야하고 나라도 양보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다”고 마치 김영삼이 고집을 부려서 안 된 것처럼 인상을 풍기는 아릇한 말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김대중은 4자필승론을 고집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평민당을 만들어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함께 만든 통일민주당을 둘로 쪼개, 다잡은 민주화도 자기 발로 걷어 차 놓고, 국민의 70%가 소원했던 군정종식을 망쳐놓았다.
타도대상이었던 노태우에게 당선의 꽃다발을 갖다 바친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죽음을 앞에 둔 김대중은 마지막으로라도 김영삼과 통일민주당 당원, 그리고 자신이 만든 평민당 당원과 민주화를 바라던 국민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진정성을 보여주었으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역시 김대중은 변명의 명수였고,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인 것을 또한번 토로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 유감이다. 후보 단일화를 무산시킨 책임은 명백하게 김대중에게 있음을 확실히 알자. ‘야권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더라면 ‘망국적 지역감정’도 그날로 깨끗이 없어졌을 것이다. 이 또한 김대중의 책임이 아니던가?
3당 합당: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이 모여 3당이 합당을 했다. 김대중은 김영삼이 정치도의를 버리고 3당이 합당한 것은 합당이 아니라 야합이라고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고 공격하고 나왔다. 나도 정상적인 정치라면 특히 타도 대상이었던 군사독재 세력과 합당한 것을 잘했다고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영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앞장서서 투쟁하여 결정적으로 민주화의 문턱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이때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개인적인 본색을 드러내 결국 독재자들에게 승리의 길을 터주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정치인은 김대중이다. 이를 믿고 김영삼은 정상적인 민주화투쟁을 할 수가 없었다.
김대중의 ‘4자 필승론’과 ‘평민당 창당’이 그의 ‘행동하는 양심’의 선명한 그림이다. 민주화 투쟁의 효과적 대응방식으로 알려진 민주화추진협의회와 2·12 선거돌풍으로 일컫는 신한민주당 창당도, 김대중을 대신하여 국내에서 민주화를 이끌던 김상현 등 그의 측근들에게, 김영삼이 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반대했다가 민주화추진협의회도 신한민주당도 성공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동의장과 상임고문직을 수락하고 권한을 행사했다.
김영삼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김대중이 있는 한 민주화는 안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군사독재 정권은 끝내야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드리고 불가피한 차선을 택한 것이 구국적 결단이라는 3당 합당이었다.
3당 합당으로 문민정부도 탄생하고 민주화도 성취했다. 그래도 조그마한 양심은 있었던지 결정적인 민주화의 기회를 놓치고 나면, 그때마다 “정치를 그만 두겠다”고 여러 번 선언하고 스스로 던진 그물에 걸려 좌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김대중은 또 김영삼이 3당합당으로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를 발판으로 대통령도 되고 또 꿈에도 그리던 노벨평화상도 타고 그리고 죽어서는 국장까지 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제 김대중을 따르는 사람들은 후보단일화는 양김의 공동 책임이라거나 3당 야합이라는 속 보이는 소리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지난 32년간의 민주화 투쟁의 역사는 김영삼 박정희의 싸움이었다
김영삼은 학생 때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확신하고 그것의 성취를 위하여 총칼로 무장한 박정희의 위압에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많은 국민이 겁에 질려 강요된 복종으로 숨죽이고 있을 때, 일관된 철학적 진정성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투쟁했다.
박정희에게는 목숨 걸고 항거하는 김영삼이 눈의 가시였다. 김영삼의 입을 막으려고 협박과 회유, 어느 방식을 써도 김영삼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독재정치로 일관한 박정희에게는 집권기간 내내 김영삼을 없애는 정책으로 고심하면서도 박정희의 가장 두려운 상대는 언제나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철학이요, 확신이었기에 박정희는 김영삼의 일관된 진정성이 가장 두려웠고 결국 그를 없애려다가 자신이 먼저 죽음을 당한 것이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김영삼이 가장 두려운 상대였다
김대중도 민주화투쟁의 광장에 함께 있었지만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그의 민주화투쟁은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박정희도 전두환도 김대중은 김영삼에 비하여 별로 겁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김대중을 납치도 하고 사형 선고도 했고, 그러면 김대중은 큰 잘못도 없으면서 살려 달라고 탄원서를 내고 겨우 목숨을 연장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김영삼, 김대중, 박정희의 독재와 민주화의 대결로 마치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역사였다.
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일관되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김영삼과 총칼과 부당한 돈이 유일한 통치수단이었던 박정희. 그 두 사람의 싸움이 主였다. 거짓말을 일삼는 김대중은 종속 변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책의 제목을 ‘김영삼과 박정희’로 한 까닭이다.
흔히들 정치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최고이고 최선이라고 강변한다면, 정당한 비판과 냉철하고 겸손한 반성을 저버리는 또 다른 억압이요 탄압이다. 이 또한 군사 통치에 길들여진 타성에서 나오는 위선은 아닌가 생각된다.
가정이 있어야 비판도 하고 반성도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이상 (理想)의 실현과 선진(先進)을 위하여 필요(必要)를, 그 필요가 수요(需要)를 낳고, 수요는 공급의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인간의 역사다.
보릿고개,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그것은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몇 년 더 빠르게 혹은 몇 년 더 늦게라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정치인도 국민의 뜻에 따라 정당하게 선출된 지도자라면 투명하고 떳떳하게 더 힘있게 국민과 함께 즐겁게 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박정희의 수제자 전두환, 노태우도 감옥에서 끝을 내지 않았는가. 박정희의 시대는 박정희에게도 또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불행한 시대였다. 똑바로 보고 냉철하게 깊이 생각하자.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서 박정희 같은 반란에 의한 독재자는 다시는 나와서도 나오게 해서도 안된다. 박정희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선진국 반열에 확고하게 진입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정당하고 당당하게 합법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나와야한다. 그런 지도자가 소신을 가지고 일할 때 고속도로, 포항제철, 그런 것들이 문제겠는가.
건국 이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착을, 법과 제도에 맞게 목숨 걸고 지키는 일관된 철학과 소신이 확고한 지도자는 김영삼뿐이었다. 김영삼이 있었기에 32년의 기나긴 군사문화를 청산하고 비로소 선진화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제2, 제3의 김영삼이 나와야한다. 국민은 자신들을 위하여 나오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