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글로벌 경제 침체, 국내 경기 불황에 대한 재계의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시사오늘>은 '위기의 재계'를 통해 현재 각 그룹사들이 처한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CEO들의 출구전략, 나아가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짚어본다.
세상 떠난 구본무·물러나는 구본준의 빈자리
실적부진 속 새수장 된 구광모 회장의 선택은?
국내 재계서열 4위 LG그룹이 격변기를 겪고 있다. 故 구본무 회장이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났고, 구본준 부회장은 주요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으며 2인자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난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두 기업인의 퇴장으로 비어버린 자리는 40대 초반의 젊은 총수 구광모 회장이 채우게 됐다. 거센 변화의 물결이 LG그룹을 집어삼키듯 몰려오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오는 15일 열리는 LG전자, LG화학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구본준 부회장이 역임하던 등기이사직에 전문경영인을 선임하는 안건이 처리될 예정이다. 그의 퇴진은 LG그룹의 전통인 장자 승계 원칙에 따른 '구광모 시대' 개막의 공식화 수순이라는 평가다. 이로써 구광모 회장은 본격적으로 재벌 4세 경영체제의 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건은 구 회장에게 그리 녹록지 않은 실정이다. 경영권 승계로 인한 개인적 피로감을 이겨내야 하고, 격변기를 맞아 어수선한 사내 분위기를 다스려야 한다. 무엇보다 사령탑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받아든 성적표가 좋지 않다는 점, 그룹 차원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은 신사업이 지지부진한 점 등이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2018년 LG그룹의 세전이익은 전년 대비 36.7% 급감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핵심 계열사별 실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난해 LG전자는 전년대비 9.5% 증가한 2조7033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당기순이익은 21.2% 감소한 1조4728억 원으로 집계됐다. MC사업본부, VC사업본부의 만성적자와 4분기 어닝쇼크 영향이 컸다. 같은 기간 LG디스플레이도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12.4%, 96.2% 줄었다.
또한 LG유플러스는 2018년 매출 12조1251억 원, 영업이익 7309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각각 1.3%, 11.5% 감소한 수치를 보였고, 당기순이익도 12.0% 줄었다. 같은 기간 LG화학의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 역시 각각 23.3%, 24.9% 떨어졌다. 다만 LG생활건강은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각각 10.5%, 11.7% 증가하며 핵심 계열사로서 그룹의 체면을 살렸다.
구 회장 입장에서는 격변기에다 실적부진의 이중고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 때문에 재계에서는 올해가 그의 경영능력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가운데 구 회장이 꺼낸 승부수는 '초심'으로 보인다.
연초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새해모임에 참석한 구 회장은 신년사에서 "우리 안에 있는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의 기본 정신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우리에게는 고객과 함께 70여 년의 역사를 만들어 온 저력과 역량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룹의 상징적 구호인 고객사랑을 강조하며 구성원들에게 초심으로 돌아가 주길 주문하는 동시에 임직원들의 결집력 강화를 모색했다는 평가다.
LG그룹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인 연구개발에 역점을 뒀다는 평가도 나온다. 신년사를 LG사이언스파크에서 공개한 데 이어, 올해 첫 대외행보로 다시 LG사이언스파크를 찾아 R&D 인재들을 격려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고객과 사회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기업이 되고 싶은 LG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믿음과, 최고의 R&D 인재육성과 연구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결국 구 회장이 작금의 LG그룹 구성원들에게 주문하는 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라고 해석할 수 있다"며 "초심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각인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R&D 투자, 신사업 등을 통해 새로운 '구광모의 LG'를 구축하겠다는 의중"이라고 분석했다.
뉴LG 핵심은 '脫권위', 권영수 부회장은 그룹내 소통 강화 주력할 듯
일각서 "젊은 총수 답게 'CEO·의장 분리' 등 변화 앞장서는 모습 필요"
이처럼 LG그룹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뉴LG' 구축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구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바로 탈(脫)권위다.
실제로 구 회장은 취임 직후 그룹 계열사 임원진들과의 간담회에서 자신을 '회장'이 아닌 '대표'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홍보팀의 공식 보도자료에서도 '회장'이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LG그룹은 매분기마다 개최하는 정례 행사인 임원세미나도 'LG포럼'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매월 1차례만 열 계획이다.
재벌 대기업 LG의 보수적인 이미지를 실용주의, 탈권위를 앞세워 타파하고, 젊은 총수로서 재계에 신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심산으로 풀이된다. 또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임직원간 원활한 소통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회사 안팎에 천명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권영수 부회장을 중용하고 있는 점도 이 같은 해석에 힘을 싣는다. LG그룹은 구 회장이 취임한 직후인 지난해 7월 권영수 당시 LG유플러스 부회장은 ㈜LG COO(최고운영책임자)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권 부회장은 오는 15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LG전자, LG디스플레이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유플러스 등 그룹 핵심 계열사를 거친 권 부회장을 곁에 두고, 그의 권한을 확대시킴으로써 그룹과 계열사, 그리고 각 계열사 간 폭넓은 소통을 모색하겠다는 구 회장의 의중이 엿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구 회장과 LG그룹이 탈권위와 소통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이유에서 비판도 나온다.
재계에 따르면 구 회장은 LG그룹의 지주회사인 ㈜LG의 대표이사직과 이사회 의장직 겸임을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사회적 가치와 이사회 독립성 강화 측면에서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결정을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그룹 내 소통을 위해 꺼내든 '권영수 카드'가 정치권 등 대외 소통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공산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권 부회장은 LG유플러스 대표이사를 역임할 당시 국회 국정감사 출석 여부를 놓고 논란을 야기해 여러 의원들로부터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앞선 재계의 한 관계자는 "CEO와 이사회 의장직 분리가 최근 대세다. 구 회장은 젊은 총수인 만큼, 시대 변화에 보다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며 "권 부회장도 마찬가지다. 내년에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에 그룹 내부 뿐만 아니라, 밖에도 소통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좌우명 : 隨緣無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