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노태우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2020년 보수는 통합을 택했고, 참패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에도 그랬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지금의 보수 세력이 형성됐지만, 2년 후 제14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두 사례는 단순 통합만으로 선거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난 2월 보수 통합 직전, △자유한국당(105석) △새로운보수당(7석) △미래를향한전진4.0(1석)으로 총 113석(37.7%)이었다. 그러나 합당 이후 제21대 총선 결과, 통합당은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19석을 포함해 103석(34.3%)에 불과했다. 이로써 보수 통합 이후 통합당은 10석(3.4%포인트)이 부족해졌다.
1992년 제14대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125석) △통일민주당(59석) △신민주공화당(35석)으로 총 219석(73.2%)이었다. 하지만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은 제14대 총선에서 149석(49.8%)을 차지했다. 이로써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은 70석(23.4%포인트)이 줄어들었다.
왜 2020년 통합당과 1992년 민자당은, 통합 이후 각각 10석(3.4%포인트)과 70석(23.4%포인트)을 잃었을까.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한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2년 제14대 총선이다.
1990.02.13. 민주자유당 출범
1990년 1월 22일, 10개월간의 긴 협상 끝에 3당 합당이 이뤄졌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2월 13일, 민자당이 공식 출범했다. 이로써 전체 의석 299석 중 218석의 거대 야당이 탄생됐다.
(3당 합당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343)
이날 민자당 최고위원에 김영삼‧김종필‧박태준, 사무총장에 박준병, 정책위의장에 김용환, 원내총무에 김동영 의원이 각각 임명됐다.
한편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은 3당 합당 반대 투쟁을 계속했다. 통일민주당에서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노무현 △김정길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등 8명은 꼬마 민주당으로 남아 있었다.
그에게 정치 입문을 제안한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았던 노무현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자서전을 통해 김영삼을 ‘일그러진 영웅’으로 표현했다.
김영삼 대통령을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직의 탁월한 보스’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략)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 부하로 만드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김영삼 총재가 3당합당 때는 김정길 의원과 나를 아예 부르지 않았다.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쓸모가 없어졌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와 갈라섰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상도동 자택을 찾아갔던 날까지, 13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87년 대통령 선거 때 두 지도자가 민주 세력을 분열시킨 이후, 그 분열을 치유하고 민주 세력을 통합하는 것이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그 반쪽을 들고 민정당과 합쳐 버리는 바람에 통합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때 나의 영웅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일그러진 영웅’이 되고 말았다. 나는 20년 동안 그가 만든 지역 분열의 정치구도와 싸워야 했다. 그가 만든 기회주의 정치문화와 대결해야만 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26쪽.
민자당은 출범 이후 ‘구국의 결단’과 ‘기회주의 야합’이라는 양가적 평가 속에서 삐걱거리며 굴러갔다.
1990.10.25. 내각제 파동
하지만 3당 합당의 균열은 외부 비판이 아닌, 내각제 파동에서 비롯됐다. 합당 이후 5개월을 살펴보면, 민자당의 내부 분열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 1990.01.22. 3당 협상 과정
내각제 파동의 연원(淵源)은 3당 합당을 발표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각제 개헌’ 논의는 1월 22일 김종필‧김영삼‧노태우 세 사람의 회담 과정에서 등장했다.
노태우는 이날 △의회민주주의 구현 △1년 이내 의원내각제 개헌 △금년 중 개헌작업 착수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합의각서를 작성했으며, 3당 합당과 함께 이를 기자회견할 예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원래는 이날 내각제 합의 각서의 내용까지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김영삼 총재 측이 ‘보안 유지’를 부탁함에 따라 각서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자신의 참모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상태인 데다가 내각제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와 평민당의 반대를 감안하면 비밀리에 추진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88쪽.
그러나 김영삼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노태우가 내각제 논의를 ‘잠시’ 언급했으나, 그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통합을 위한 회담에서 노태우가 내각제를 논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잠시 언급했지만, 내가 앞으로 얼마든지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반대해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6쪽.
- 1990.2~5月. 대권 욕심 vs 공작 정치
노태우와 김영삼은 각각 2월과 5월의 일화를 꺼내 들었다.
노태우는 2월 12일 관훈 초청 토론회와 2월 말 박철언 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김영삼의 ‘내각제 합의 무산’으로의 입장 변화를 설명했다. 그는 이를 김영삼의 “대권에 대한 노골적인 욕심”으로 평가했다.
합당 직후부터 어려운 고비가 닥쳐왔다. 김영삼 최고위원이 차기 대권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합당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 합의 각서까지 작성했던 김 최고위원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2월 12일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한지 2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 문제를 지금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2월 말에는 김 최고위원은 박철언 장관을 자신의 차남 김현철 군의 아파트에 불러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90쪽.
한편 김영삼은 5월 5일 전당대회 직전 상황을 통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명시했다.
나의 반대로 내각제를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한 노태우는 1990년 5월 9일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내각제를 당의 공식입장으로 확정짓고 싶어했다. 5월 5일 토요일, 전당대회를 준비하던 김동영은 협상대표들이 내각제에 합의한다는 내용의 문안을 수첩에 적어서 내게 가져왔다. 나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내각제개헌 문서화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자 노태우가 노재봉 비서실장을 보내 나에게 말을 전해 왔다. “내각제라도 한다고 해야 다른 계파에서 통합을 흔쾌히 수용하지 않겠습니까. 합의각서는 절대 외부에는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6쪽.
이어 김영삼은 다음 날인 5월 6일, 박준병 사무총장이 합의각서에 서명을 부탁한 일화도 덧붙였다.
나는 이때에도 박준병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다. “내각제는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므로 불가능하다. 나 자신도 내각제를 반대한다. 다만 세 계파의 융화를 위해 이런 형식이 굳이 필요하다면 서명은 해주겠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6~277쪽.
그로부터 5개월 후, 10월 25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내각제 합의각서 내용이 담겼다. 유출된 합의각서를 두고 김영삼은 ‘공작 정치’라고 비판했다.
각서는 고의적으로 유출된 것이 분명했다. 물론 노태우의 지시 없이 각서가 유출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약속을 위반한 노태우의 공작정치를 용납할 수 없었다.
합의문서 공개는 처음부터 나를 궁지에 몰아넣어 고사시키려는 정치공작이다. 군사정권식 발상이다. 내각제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8쪽.
노태우는 유출된 각서에 대해 “박준병 사무총장의 부주의로 출입기자가 문건을 훔쳐본 것”이라 해명했다.
이 문건은 의원내각제를 약속한 비밀문서로 박준병 사무총장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유출됨으로써 내각제 의도가 조기에 노출되고 말았다.
(중략) 어쨌든 일어난 일이니 먼저 유출 경위 등 진상을 밝히고 원만하게 수습하는 것이 중요했다. 경위를 조사한 결과 박준병 사무총장의 부주의로 중앙일보의 당 출입기자가 그 문건을 훔쳐본 것으로 밝혀졌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94~495쪽.
한편 제3자인 김대중은 이 사건을 권력 다툼으로 봤다. 그는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하는 구 민주계와, 의원 내각제로 권력을 창출하려 한 구 민정계와 공화계의 ‘암투(暗鬪)’로 평가했다.
이 각서가 공개되면서 민자당 내 계파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구 민정계와 공화계는 의원 내각제로 권력을 창출하려 했고, 구 민주계는 김영삼 씨를 노태우 대통령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현행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했다. 계파 간 암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74쪽.
1990.10.31.~11.06. 김영삼의 은둔과 내각제 개헌 포기
김영삼은 이 사건 직후 당무를 중지하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 다수와 야당이 반대하는 것이 확실한데도, 내각제 개헌을 끌고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 후 나는 마산의 아버지 댁으로 내려갔다. 내가 마산으로 내려간 것은 노태우가 나에 대한 공작정치를 중단하지 않는 한 분당까지도 각오한 ‘최후통첩’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80쪽.
그러나 분당까지도 고려한 김영삼의 최후통첩에 노태우의 반응은 냉담했다.
같은 날 노태우는 출입기자들에게 “마산에 가고 싶으면 가고, 생각할 것이 있으면 하는 것이지 의미부여할 게 뭐가 있느냐”며 “당무는 다른 사람이 대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노태우는 회고록을 통해서도 당 지도부와의 상의도 없이 은둔한 것에 대해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기사가 나온 지 며칠 후인 10월31일 당 지도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는 마산으로 내려가 은둔해 버렸다. 나는 일이 고약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 대표 최고위원으로서 유출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라 당직자들의 의견을 물어 일을 속히 마무리해야 할 책무가 있는데, 모든 것을 무시하고 돌출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몹시 못마땅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94쪽.
이틀 뒤 민주계 의원들이 마산을 찾았다. 이들은 김영삼에게 분당 내지 탈당을 요구하는 50명 전원과 지구당위원장 45명의 서명을 전했다. 김영삼은 “나로서도 정말 분당해야겠다고 결심을 다지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같은 날 민주계 의원들이 돌아간 뒤 김윤환이 김영삼을 찾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김윤환은 김영삼과 노태우 두 사람의 주례회동을 제안했다.
그로부터 4일 뒤 11월 6일, 김영삼과 노태우는 청와대에서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3시간여 동안의 회동을 통해 내각제 개헌의 포기와 당내 기강 확립 등의 8개항에 합의했다.
노태우는 이를 두고 “참기 힘든 인내심이 요구되는 일”이라 회고했다.
나는 합당에 따른 불협화음이 여러 번 닥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김 대표가 오해를 풀고 당무에 복귀하도록 애를 썼다. (중략) 11월6일 나는 김영삼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로 생긴 그 동안의 오해를 풀고 당 내분을 수습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원만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참기 힘든 인내심이 요구되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95쪽.
한편 김영삼은 당시 분당‧탈당까지 요구했던 민주계 의원들을 설득했다.
민주계 의원들에 대해서 나는 손을 잡고 비장한 각오로 설득했다.
“이번만은 참자. 3당통합이란 엄청난 결단을 내렸는데, 적어도 1년은 지켜 봐야 되지 않겠는가. 그때까지도 비전이 안 보이면 내가 앞장서겠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87쪽.
분당 직전까지 몰고 갔던 1990년 내각제 파동이 정리되며, 민자당의 내분도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1991.04.09.~09.16 민주당 출범
평민당은 4월 9일 재야인사들과 구 야권 인사들을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재출범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 8월엔 신민당이 8명의 의원이 있는 꼬마민주당과 당 대 당 통합을 제안했다. 의석수로는 67대 8로, 김대중은 이를 “파격적인 양보”라 회고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9월 16일, 신민당과 민주당은 야권 통합을 통해 민주당으로 출범했다. 공동대표에는 김대중‧이기택, 최고위원에는 이우정‧박영숙‧박영록‧허경만(신민당계)과 조순형‧김현규‧이부영‧목요상(민주당계), 사무총장에 김원기, 원내총무에 김정길, 정책위의장에 유준상, 마지막으로 대변인에 노무현이 추대됐다.
1992.01.10.~11 민자당 대권 후보 문제, 통일국민당 창당
1992년은 제14대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열리는 해였다. 기자들은 1992년 1월 10일 연두 기자 회견장에서, 노태우에게 김영삼이 대권 후보로 내정됐는지 등을 물었다. 당시 노태우는 공개적 지명 의사를 밝히는 것을 주저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대권 후보가 너무 일찍 부각되는 것은 우리 현실로 보아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동시에 노태우는 김영삼을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염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당시 내 마음 속에는 김 대표를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만들려는 구상이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으므로 그 약속을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징검다리 역할’이란 나에 이은 다음 대통령 후보는 군 출신이 아닌 민간 출신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96쪽.
반면 김영삼은 총선 전에 대권 후보가 미리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의 양대 선거는 국민들이 미래의 정부를 선택하는 중요한 심판 무대였다. 나는 3월 24일 치러질 총선을 앞두고 이 나라의 차기를 이끌어 갈 대통령후보가 미리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중략) 후보문제를 둘러싼 내분이 증폭되자 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1992년 1월 7일 오후, 민자당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나는 “국민의 최대 관심사인 민자당의 대통령후보 문제가 결정되지 않은 게 정치‧경제‧사회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전제, “국민을 안심시키고 총선 승리를 위해 총선 전에 먼저 차기후보를 결정하는 것이 상식이고 순리”라고 밝혔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98~299쪽.
이에 대해 노태우는 “합당을 했지만 우리 측을 확고하게 믿는 자세가 아니었다”며 “야당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 대표 측에서는 대권 후보가 조속히 가시화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합당을 했으면서도 우리 측을 확고하게 믿는 자세는 아닌 듯했다. ‘이용만 당하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버림을 당하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직간접적으로 김 대표를 차기 대권 후보로 보장받으려고 했다. 국민들에게도 이를 기정 사실화하려고 애썼다.
나는 그런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지만 ‘야당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500~501쪽.
한편 기자회견 다음 날, 통일국민당의 창당 발기대회가 열렸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권 도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날 창당준비 위원장에 정주영, 부위원장에 양순직, 사무총장에 이용준, 대변인에 이인원이 각각 내정됐다. 이로써 1992년 총선과 대선의 3자구도가 완성됐다.
1992.03.24. 제14대 총선
합당 이후 여러 차례 지지율의 등락(登落)을 거치고, 여러 차례 내분에 휩싸였던 민자당은, 결국 총선에서 패배했다.
제14대 총선 결과 ‘과반수 의석(150석 이상)’을 목표했던 민자당은 149석(지역구 116석, 전국구 33석)을 획득했다. 반면 ‘개헌 저지선(100석 이상) 확보’를 목표한 민주당은 97석(지역구 75석, 전국구 22석)을,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 확보’를 목표한 통일국민당은 31석(지역구 24석, 전국구 7석)을 획득했다.
노태우는 “안정 의석 확보”라면서도 “정국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평가했다.
과반수에서 한 석이 모자랐지만 곧 무소속 당선자를 영입해 안정의석을 확보했다. (중략)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데 대하여 국민들이 나름대로의 심판을 한 셈이었다. 정주영 씨의 국민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 정도의 의석수를 얻은 것을 보고 나는 앞으로의 정국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506쪽.
김대중은 “민주당 대약진”이라 자평했다.
3‧24 총선 결과는 민자당의 참패였다. (중략) 민자당 참패, 민주당 대약진, 국민당 돌풍으로 요약될 만한 선거였다. 민자당의 참패 이유는 결국 3당 합당에서 찾아야 했다. 3당 야합에 국민들이 매를 들었던 것이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82쪽.
1992.3月. 총선 책임론
선거가 끝나고, 민자당 내부에서 총선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등장했다. 이때 노태우와 김영삼을 둘러싸고 책임질 주체 문제로 또 한 번 부딪쳤다.
김영삼은 노태우의 공천 실패와 안기부의 선거개입 등을 패인으로 지적했다.
노태우는 겉으로는 “김영삼 대표가 총재인 나를 대신해 민자당의 중심이 돼 14대 총선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수구적인 작태를 보였다. 노태우는 자신의 친‧인척들에게까지 거리낌 없이 공천을 주었고, 전국구에도 자신의 친위세력이나 구태의연한 인물들을 당선권에 올려 놓았다.
공천 실패, 최고위원들의 분열, 안기부와 기무사의 구태의연한 선거개입 등 많은 패인이 있었다. 무엇보다 총선을 앞두고서도 민자당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방치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00~301쪽.
이어 그는 총선실패 책임론을 두고 “선거를 주도한 노태우가 오히려 내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조짐이 나타났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그는 대권 후보 출마를 선언하며 국면을 전환하려고 했다.
실제 모든 선거를 주도한 노태우가 오히려 내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총선 책임론이라는 형식 아래 그들은 이번 기회에 나에게 결정타를 가할 속셈이었다.
나는 총선 패배의 책임공방이 당력을 소진하는 무한 소모전으로 치닫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당을 본래의 궤도에 올려 놓아야 했다. 3월 27일, 나는 청와대에서 노태우와 만나 향후 당운영에 대해 협의했다. (중략) 나는 이 자리에서 “5월 초순에 열릴 민자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에 후보로 나설 것임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밝히고, “나는 우리 당의 어느 누구와도 정정당당하게 선의의 경쟁을 벌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01쪽.
노태우는 책임론에 대한 언급은 별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의도 없이 후보 경선 출마 선언에 “적잖은 충격”이라고 회고했다.
총선의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김영삼 대표가 일을 벌렸다. 1992년 3월 28일 그는 총재인 나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바로 전날인 3월28일 나는 총선 후 처음으로 김 대표로부터 주례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 대회를 5월에 갖겠다는 총재로서의 지침을 전달했다. 김 대표도 이에 이의를 달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가 바로 다음 날 일을 벌인 것이다.
김 대표가 서둘러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은 경선을 조기 과열화시킬 뿐, 그에게 특별히 유리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면 아래 있던 민정‧민주계 갈등이 표면화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가능한 한 대립을 피하고 원만한 타협을 통해 경선 절차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던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506~507쪽.
비록 노태우가 생각한 절차는 아니었으나, 김영삼의 말대로 민자당은 총선 책임론에서 벗어나 후보경선 문제로 분위기가 전환됐다. 시대는 1992년 총선을 넘어 대선을 향했다.
2020년 통합당과 1992년 민자당의 패인
“선거에서 이겼을 때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패배했을 때는 오만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4‧15 총선이 끝나고 3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통합당은 새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을 뽑는 자리에서, 후보들에게 가장 먼저 ‘총선 패배에 대한 원인’에 대해 물었다. 당시 통합당은 △공천 문제 △중도‧여성‧3040 공약 실패 △국민 공감‧소통 부족 등을 패인으로 들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해당된다”면서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절박한 집권 의지가 없었던 것”이라 지적했다. 주 원내대표는 “상대가 워낙 못하니 막연히 잘 되겠거니 생각하며 요행을 바랐다”며 “준비 없이 우리끼리 늘 다투며 집권 의지가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상대측 후보였던 권영세 의원은 “막판의 공천 파동 등은 피상적인 이유에 불과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권 의원은 “우리 패배의 근본 원인은 국민 눈높이에 전혀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주 원내대표가 제기한 ‘집권 의지의 문제’를 반박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우리 당이 민생 관련해 시그니처(signature) 정책이 있었냐”고 반문하며 “떠오르는 건 강경투쟁, 장외투쟁 말고 없었다”고 지적했다.
2020년 통합당과 1992년 민자당의 총선 실패는, 통합 전 물리적 결합만큼이나 통합 후 화학적 결합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1과 1이 더해졌을 때 2 이상의 상승효과를 가져올지, 2 이하의 하강효과를 가져올지는 통합 이후에 달려있었다.
이와 관련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16일 통합당과 민자당의 공통적인 패인으로 ‘공천 실패’에 주목했다. 정 평론가는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의 패배 원인으로 지목됐던 건 공천 문제였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선권보다 친분관계에서 공천을 했다. 13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던, 처남 김복동과 동서 금진호에게 지역구 공천을 줬다. 반면 김영삼의 최측근인 김명윤 조홍래 등이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막장공천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21대 총선, 통합당의 패배 역시 공천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공천 실패가 통합당과 민자당이 패배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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