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정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1532년 출간된 저서 '군주론'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비르투(virtu)’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비르투’란 군주가 따라야 할 소양 중 하나로,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규범·감정·욕망 등에 사로잡히지 않아야하며 때론 주변 세력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현대에 와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정치인이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체제 내 구성원들로부터 지지를 얻어 내는 것인데, 이는 주변인의 신뢰와 적극적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반박이다.
일견 타당한 의견이지만, 이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르투’는 주변인의 호의인 ‘포르투나(fortuna)'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시민의 지지’만 동원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지도자의 능력을 의미한다. 요컨대 정치적 리더는 오로지 주권의 주체인 국민만 바라보면서, 때론 주변인의 반대를 무릅쓰는 냉정한 선택을 해야만 정치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소리다.
실제 ‘비르투’를 제대로 행사한 리더는 대선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획득했지만, ‘포르투나’에 의존한 리더는 패배했다. 이는 올해 서거 10주기가 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선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노무현, 반대 꺾고 정몽준과 단일화… 마침내 2002년 대권 잡아
‘서민의 후보’를 기치로 내세웠던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으로 정몽준 의원 지지율이 급상승하자 정몽준 예비후보와의 단일화를 추진했다. 정 후보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6남이자 현대중공업 회장을 지낸 ‘재벌’ 출신이지만, 노 후보는 ‘기득권 청산’을 외치면서 스타가 된 인물이었다.
이때도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주변인들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한나라당의 ‘야합(野合)’ 맹공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이유를 늘어놓아도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 대결에서 뒤쳐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한 참모는 노 후보를 독대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참모는 “아무리 단일화가 중요해도 노 후보가 지지자들을 정 후보에게 양도할 권리는 없다. 노 후보는 평생 뼈빠지게 모은 정치 자산이지만, 정 후보는 월드컵 바람 한번으로 모은 자산이다. 같은 가치로 평가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단일화 협상이 깨지면 99 대 1로 한쪽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잘해봐야 6 대 4 정도로 나눠질 것이다. 게다가 단일화 실패에 따른 상실감으로 선거판에서 힘이 모아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패하는 김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2002.11.29. 한겨레21 기사 발췌
노 전 대통령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단일화를 밀고 나갔다. 이에 대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정리한 그의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있다.
"마침내 정몽준 의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통합21’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내 지지율은 최악으로 내려가 대선은 3파전으로 변했다. (중략) 결단할 때가 온 것이다. 이대로 가면 선거에서 이길 확률은 0%였다. 단일후보가 될 확률은 50%에 조금 모자랐다. 일단 단일후보가 되기만 하면 대통령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까웠다. 복잡하게 계산할 일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에 정권을 다시 넘길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정몽준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연립정부를 세우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내가 이길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중략) 민주당 후보라는 작은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은 떳떳한 선택이 될 수 없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95p
대선이 끝난 후, 노 전 대통령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목표가 당시 국민적 열망이던 정권교체에 있었던 것처럼, 노 전 대통령 역시 ‘정권을 보수 정당에 넘길 수 없다’는 목표가 있었고 이를 위해 측근들의 반대 의사까지 외면해 성공한 것이다.
이회창, 측근 말에 YS·JP세력 포용 거절… 대선만 3번 패배
그러나 이회창 전 총리는 97년, 02년 대선에서 각각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종필 전 총리(JP) 세력을 품는 것을 거절했다. 주변인들의 반대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전 총리는 97년 당시 ‘킹메이커’로 통하던 허주(虛舟) 김윤환 및 이상득·서상목 등과 함께 YS의 탈당을 결정하고, 그의 상징성이 드러나는 신한국당의 간판을 내린 후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1997년, 2002년 두 차례의 대선에서 모두 이회창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관록의 5선 정치인, 유한열 전 의원은 2011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이 패배한 이유는) 김영삼 대통령과 등을 졌기 때문입니다. 이회창 캠프의 중심멤버들이 공공연히 YS를 헐뜯고 다녔습니다. 대표적인 게 ‘YS가 이인제를 부추겨 출마시켰다’고 욕을 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내가 이회창 후보 만나서 ‘YS와 만나 도움을 받으라’는 메시지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회창은 ‘YS와 손잡으면 표가 떨어진다는데요’라고 말합디다.
(중략) 내가 YS와 이회창 후보와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이상득 서상목 등이 모여 앉아서 ‘YS가 지지하면 200만표가 달아난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이 지난 후 김윤도 변호사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회창 후보가 YS 만나는 것,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저쪽(이회창)에서 전갈이 왔습니다’고. 그때 내가 생각했지. 이제 대통령은 김대중이구나.”
자유한국당 이종혁 최고위원도 작년 11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 전 총재는 그것(YS세력 포용 거부) 때문에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이 전 총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선대위 본부장으로 발탁해 그의 조언에 따라 김윤환, 이기택, 황낙주, 조순, 신상우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낙천시켰다.
이에 대해서도 유한열 전 의원은 “(이 전 총리는) 사고가 단조롭고 자기 수신이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5년 전 김영삼을 만나지 않아 실패한 것을 상기시키며 무조건 JP를 껴안으라고 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용환이 결사반대에 나선거야. 김용환이 ‘JP를 만나러 가려면 나를 깔아뭉개고 가라’며 길에 누웠습니다. 이회창이 또 흔들렸어, 주위에서는 ‘JP 만나면 200만의 젊은 표가 달아난다’고 펌프질을 해대니…. 아무튼 이회창은 사고가 단조로워, 자기수신이 더 필요한 사람이야.”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 전 총리는 주변인의 말에 휘둘려 대권 장악에 실패했다. 주변인의 호의를 놓치고 싶지 않은, ‘포르투나’식 리더십을 선택한 것이다.
반대로 노 전 대통령은 주변인의 조언을 외면하면서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정치 영역의 지도자, 특히 대통령의 리더십은 결국 국민의 욕망을 읽고 국민만 바라보고 달릴 때 그 힘을 발휘한다. 때론 주변인의 반대를 무릅쓰는 선택을 해야만, 정권 유지 또는 탈환에 성공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이날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국민이 무엇을 요구하는 가를 '캐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노 전 대통령은 그런 흐름을 잘 읽는 사람"이라면서 "노무현 후보는 정략적 면에서 상당히 유연하고 포용적이었지만 이회창 후보는 자꾸 한 현상에 고착하는 느낌을 줬기 때문에 그것이 선거의 당락을 크게 좌우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정치 생명이 끝나간다는 것"이라며 "이 전 총리는 연대할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본인이 거부했다. 정치라는 것은 타협과 포용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또한 강 대표는 "노 전 대통령과 이 전 총리의 이런 선례가 지금 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하며 "이번에 한국당이 25일부터 장외집회를 끝내고 원내로 들어온다면, 위 사례를 분석해서 전략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비단 노무현과 이회창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문제"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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