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정치권은 4월 총선 이후, 차기 대권 주자 찾기로 분주하다. 여권에서는 이낙연 의원,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김부겸 전 의원, 범야권에서는 홍준표 의원과 안철수 대표, 그리고 윤석열 검찰총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은 어땠을까. 1992년은 제14대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열렸던 해로, 총선 이후 대선까지 270여 일의 시간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여야는 당 안팎으로 새 시대의 대통령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두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2년 제14대 대선이다. 제14대 총선 막전막후는 아래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4603)
1992.05.15. 국민당, 정주영 대통령 후보 선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민자당) 총선 실패 책임론에서 후보 경선 문제로 전환한 분위기에, 통일국민당이 가장 먼저 동참했다. 5월 15일, 국민당은 서울 삼성동 무역회관에서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이 정주영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정주영은 후보 수락연설에서 “오늘의 시대는 분단에서 통일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변화의 소용돌이가 낡은 정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시대”라며 △분단 극복 △선진 경제 창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1992.05.19. 민자당, YS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당은 민자당이었다. 민자당은 세 정당 가운데 가장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19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6660표 중 66.3%(4418명)의 지지로 후보로 선출됐다.
김영삼은 수락연설을 통해 “민족에게는 평화와 통일을, 국민에게는 자유와 정의를, 우리 사회에는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 주는 큰 정치를 펼쳐 나갈 것”이라며 △민주주의 완성 △선진경제 실현 △민족통일 성취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 1990.03.27. YS의 경선 출마 선언
민자당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의 우여곡절은 총선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은 민자당을 향한 총선실패 책임론을 후보경선 문제로 흐름을 전환한 주인공이다.
선거 직후 3월 27일, 김영삼은 노태우와 만나 당 운영을 협의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5월 초순에 열릴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에 나설 것임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김영삼의 말대로 분위기는 반전됐으나, 민자당 의원들은 김영삼에 대한 불만과 함께 하나 둘 경선 출마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이종찬 의원을 시작으로, 이한동 의원과 박태준 최고위원이 차례로 노태우를 찾았다.
김 대표가 선언 한 다음 날 이종찬 의원이 긴급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저는 각하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으니 승낙해주십시오’ 하는 승인을 받으려고 뵙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 하고 통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후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YS가 제멋대로 치고 나오는데 난들 왜 못하겠느냐’는 배짱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나무랄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어서 YS의 돌출행동을 왜 다스리지 못했습니까? 이 꼴이 무엇입니까?” 하고 따지는 것 같았다.
(중략) 다음 날은 이한동 의원이 찾아와 출마의 뜻을 내비쳤다. 그는 이종찬 의원처럼 ‘통보’ 운운하는 식의 당돌한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뜻과 희망을 밝히고 내 지도를 바란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중략) 다음 날에는 박태준 최고위원이 찾아왔다. (중략) 그는 간접화법으로 자신의 주위에서 후보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표에 대해 처음에는 도우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를 책임질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507~509쪽.
노태우는 회고록을 통해 이종찬과 박태준의 대선 후보의 대안이 될 수 없었던 이유로 ‘군 출신’을 들었다. 그는 본인의 군 출신 배제원칙을 설명하며, 회고록을 통해 “우리 국민이 더 이상 분열되지 않고 화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십 년간 쌓여 온 한(恨)을 풀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기억은 달랐다. 그는 정가(政街)에서 유행한 ‘노심(盧心)’이란 단어를 들며 “노심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했다”고 비판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대통령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노태우는 끝내 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 김영삼 회고록 3권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01~302쪽.
- 1992.03.29. YS의 JP 지지 요청
3월 29일 민자당 의원들이 노태우를 찾을 시점, 김영삼은 청구동의 김종필을 찾았다. 김영삼은 김종필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김종필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YS의 승부사 기질이 돋보이는 사건”이라면서도 “YS는 3당 합당인 주체인 노 대통령과 나로부터 이심전심의 약속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대표가 예고도 없이 불쑥 청구동 내 집으로 찾아왔다. (중략) 집권당의 총선 패배에 누구보다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은 당 대표인 YS였다. 하지만 그의 안중에 총선 패배는 없는 듯했다. YS 특유의 쟁점 전환, 판 뒤집기였다. 그는 총선책임론이 번지는 불리한 국면을 거꾸로 출마 선언을 함으로써 대선 정국으로 돌려버렸다. 굳이 좋게 말하자면 YS의 승부사 기질이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YS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칩거를 그만 하시고 당사에 나와 주십시오”라며 나를 종용했다. 그러곤 이내 당내 대선 후보 경선 문제를 꺼내며 “나를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사실 시기의 문제였을 뿐 나는 1990년 3당 합당 때부터 마음속으로 차기는 당내에서 둘째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YS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노태우 대통령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YS가 야당 체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국정 관리에도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자 노 대통령의 YS를 향한 마음은 수시로 흔들렸다. YS는 3당 합당인 주체인 노 대통령과 나로부터 이심전심의 약속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했다. 그래서 YS는 1991년 초부터 민자당의 차기 대권 후계구도가 조기에 가시화돼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173~174쪽.
- 1992.05.17. 이종찬 경선 거부
김종필의 김영삼 지지 선언으로 경선 승리는 김영삼으로 기운 듯 보였다. 이때 이종찬이 전당대회를 불과 이틀 남겨 두고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오늘 민자당의 위장된 대통령 후보 경선 거부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또 이종찬은 경선 과정에서 대의원들에게 외압이 가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종필의 지지 선언에 대해서도 “이것이 바로 밀실정치에 의한 담합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자유 경선을 바라는 모든 국민, 그리고 민자당의 장래를 염려하는 모든 당원 동지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이로써 김영삼 혼자 단독 후보로 남으며, 집권 정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하려던 경선은 물거품 됐다.
노태우는 경선 과정 속 당내 분열에 따른 고민을 회고록에 담았다.
나는 대통령 후보 경선 준비 과정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통령으로서, 또 당 총재로서의 권위가 손상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내 성격과 결단력이 약해서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중략) 나는 역사가 내게 맡겨 준 과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결단의 모습과는 반대로 비치는 것이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중략) 그 내용에 있어서는 더 어렵고 무서운 결단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치곤 했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512~513쪽.
1992.05.25~26. 민주당, DJ 대통령 후보 선출
마지막으로 민주당은 25~26일 이틀간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펜싱경기장)에서 제1차 정기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대의원 과반수 지지를 받아 이기택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로써 김대중은 1971년과 1987년에 이어 대선 삼수생이 됐다.
김대중은 수락연설을 통해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기필코 승리를 쟁취해 국민과 당에 영광을 바칠 것”이라 다짐하며, △대화합 정치 실현 △경제 정의 실천 △공화국 연합제에 따른 1단계 통일 성취 △도덕적 선진 국가 등의 비전을 내세웠다.
한편 양일간 함께 열렸던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신민당계 6명(김상현, 김영배, 조세형, 박영숙, 정대철, 김원기)과 민주당계 2명(김정길, 이부영)이 당선됐다.
26일자 <한겨레>는 세 정당의 전당대회 비교하며, 특히 민주당 전당대회를 “정치의 재미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민주당의 이날 전당대회 표정은 지난 19일과 15일에 각각 대회를 치른 민자‧국민당에 비하면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민자당은 전경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대통령 후보만 예정된 파행 경선으로 선출을 강행하고, 최고위원들을 재추대했다. 국민당은 ‘전당대회 음해’를 빌미로 청년부대를 동원해 출입을 철저히 통제한 가운데 이견을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일사천리로 대회를 끝맺었다.
민자‧국민당의 전당대회가 대의원들에게 무대만 있고 관객은 없는 ‘들러리 대회’였다면, 이날 민주당의 전당대회는 어느 모로 보나 ‘대의원의 날’이었다.
- 1992년 5월 26일자 <한겨레>
1992.08.25.~09.18. 노태우 민자당 총재직 사임과 탈당
노태우는 8월 25일 민자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후임은 김영삼이었다.
나는 민자당 총재직을 김영삼 대표에게 물려주는 시기를 검토했다. 주위에서는 9월이나 10월이 적합하다는 의견들이었다. 나는 좀 더 앞당겨 8월 안에 물려주는 것이 선거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내에서는 이 의원의 경선 거부 및 탈당에 따른 후유증이 아물지 않은 데다가 박태준 최고위원마저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등 체제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태로 선거에 임했다가는 예상 외의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가능한 빨리 총재직을 물려줌으로써 새로운 체제를 강화시킬 계기로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했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521쪽.
이로써 민자당의 모든 권력은 김영삼에게 넘어갔다.
이로부터 6일 후, 충남 연기 군수 한준수가 “이상연 내무장관과 이종국 충남지사 등이 노대통령의 측근인 임재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자금을 살포하고 공무원들을 동원했다”며 관권(官權) 선거를 폭로했다.
이에 노태우는 9월 18일 김영삼과 만나 “연기군 관권선거 시비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내가 중대한 결심을 하나 해서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며 “대선을 앞두고 중립내각을 구성하되, 공명선거를 국민들에게 약속한다는 차원에서 내가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말했다.
김영삼은 당시를 회고하며 “선거를 앞두고 당내 최대 계파를 대변하는 노태우가 탈당하는 것은 나의 당선을 방해하겠다는 의사표시”라고 비판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노태우에게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전통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중략) “마음대로 해 보라. 대통령선거가 끝날 때까지 당신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잘라 말하고 당사로 돌아왔다. (중략) 선거를 앞두고 당내 최대 계파를 대변하는 노태우가 탈당하는 것은 나의 당선을 방해하겠다는 의사표시나 마찬가지였다.
(중략) 노태우는 나의 당선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신이 탈당할 경우 당이 분열돼서 결국 나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질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계산은 오판이었다.
노태우의 탈당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민자당은 일대 혼란에 빠졌고, 김재둥의 민주당과 정주영의 국민당은 환영 일색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편, 317~318쪽.
그러나 김영삼의 분노와는 달리, 노태우의 회고록에는 ‘김영삼의 찬사를 받았던 결단’이라고 명시했다.
예측한 대로 나의 9‧18선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략) 김영삼 총재는 나와의 회동 후 나의 결단을 “6‧29에 버금가는 공명선거를 위한 큰 의지의 표시다. 크게 평가해야 할 일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529쪽.
1992.12.15. 초원복집 사건
정주영 측의 김동길 선거대책위원장이 12월 15일,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을 터뜨렸다.
그는 광화문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11일 오전 6시 부산시 남구 대연3동 초원복국 집에서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 김영환 부산 시장, 박일룡 부산 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지부장, 김대균 기무사 지대장, 우명수 교육감, 정경식 지검장, 박남수 부산 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모여 지역감정 자극 등을 통한 김영삼 후보 몰표 유도 방안을 논의했다”며 녹음 테이프를 공개했다.
녹음 테이프에는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불러 일으켜야 된다’는 주장부터, ‘정주영 운운하는 부산 놈은 쓸개가 없는 놈’이라는 비난 등 김영삼 당선을 위한 지역감정 조장이 담겼다.
이 사건의 핵심에는, 민정계의 지지 기반이었던 대구‧경북(TK)이 김영삼에게 반감을 가진 틈을 정주영이 파고든 데 있다. 이에 민자당이 TK 민심을 다잡기 위해, 선거 전략으로 지역감정 조장을 논의한 것이다.
김대중은 회고록을 통해 지역감정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법을 세워야 하는 법무장관, 나라를 지키는 군인, 비리를 척결해야 하는 검찰, 국가 정보를 관리하는 안기부 지부장, 민생과 치안을 살펴야 하는 경찰청장, 시정을 책임진 시장, 참교육을 당부해야 하는 교육감들이 모여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다. 낮에는 지역감정이라는 망국병을 타파하자고 외치면서 밤에는 저희끼리 모여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서로의 눈을 껌벅거리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03쪽.
또한 김대중은 사건의 본말이 뒤집혀도 수습하지 못하는 국민당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자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은 “이번 사건은 노 대통령과 현승종 총리의 중립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무원들이 저지른 일이다”며 선을 그었다. 민자당 역시 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발뺌을 했다. 김영삼 후보는 한 술 더 떴다.
“부산 사건은 민자당과 전혀 무관한 일이고 이번 사건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공작 정치의 피해자로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 자체가 공작 정치의 일환이다. 불법적인 도청 행위를 뿌리 뽑아야 한다.”
사건의 본말을 간단히 뒤집어 버렸다. 적반하장이었다. 기관장들이 저지른 사회악을 만천하에 고발했는데 “왜 이를 엿들었느냐”고 윽박질렀다.
언론들도 “왜 도청했느냐”며 국민당을 몰아붙였다. 신생 정당 국민당은 일을 벌였지만 이를 수습하지 못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공세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만일 국민당이 도청한 행위에는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 하고 녹취한 내용을 국민에게 알렸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국민당의 한계처럼 느껴졌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03쪽.
한편 당사자인 김영삼은 사건에 대해 짧게 서술했다.
이로 인해 선거 막판에 지역감정 문제가 이슈로 급부상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 정치가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편, 344쪽.
1992.12.18. 제14대 대선
총선 이후 270일 후, 우여곡절을 거쳐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막이 올랐다. 결과는 김영삼이 42.0% 득표율로, 김대중(33.8%)을 8.2%포인트 앞서 승리했다. 한편 정주영은 16.3% 득표율에 그쳤다.
선거 3일 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은 선거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민자당이 불법 도청과 사생활 침해로 프레임을 전환시키며, 김영삼은 부산(73.3%), 대구(59.6%), 경북(64.7%)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올렸기 때문이다. 반면 이 사건의 수혜자로 예상됐던 정주영은 대구에서 19.4%, 경북에서 15.7%의 득표율에 그쳤다.
김대중은 대선 결과에 반영된 지역감정 조장의 성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나는 초원복집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감이 좋았다. 아무리 여당 후보지만 김영삼 씨도 별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으로 선거는 이기지 않을까.’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선거판에서 지역감정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용공 시비와 함께 지역감정은 선거 때마다 유령처럼 나타나 판세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역 기관장들이 나서서 이렇듯 지역감정을 선동한 사실이 밝혀진 이상 경상도 민심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 저들이 사실을 왜곡하여 민심을 속인 것이 들통 났기 때문이다. 경상도 유권자들도 여당과 정부의 태도에 격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개표 결과는 초반부터 지역 대결 양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역풍을 불러왔다. 악재가 호재로 둔갑하여 경상도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의 몰표가 쏟아졌다. 지역감정과 색깔론이 모든 이성적 판단을 삼켜 버렸다. 반(反)전라도 지역 정서가 경상도 외 다른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서울과 전라도를 밴 나머지 지역에서 모두 패했다. (중략) 그들의 바람대로 지역감정 조장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03~605쪽.
김대중은 선거 다음 날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며 40년간 몸 담았던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한편 김영삼은 “승리를 예상했다”면서도 “그 날, 그 순간은 온통 감동이고 눈물이고 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미 승리할 것은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는 그 순간 나는 형언하기 힘든 감동에 휩싸였다.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된 지 만 38년, ‘40대기수론’으로 대통령직에 첫 도전장을 낸 지 22년, ‘미래의 대통령’을 꿈꾸던 소년 김영삼은 마침내 그 꿈을 이뤄 낸 것이다. 보람과 함께 감동이 밀려왔다. 1954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나는 큰 감동을 느꼈다. (중략)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1992년 12월 그 날, 그 순간은 온통 감동이고 눈물이고 꿈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편, 353쪽.
92년 대선…YS의 ‘문민정부’ 탄생
대권(大權)은 모든 정치인에게 일생의 꿈이자 도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스물여섯에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예순넷에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어언 40년의 시간을 ‘투쟁’으로 표현했다.
그는 세 권으로 구성된 회고록 말미에 “인생은 투쟁”이라며 “자유를 위한 투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부정에 대한 정의의 투쟁”으로 설명했다. 이어 그는 “투쟁이 없으면 인생이 없고, 자유가 없으며, 나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덧붙였다.
제14대 대선은 군인 후보를 배제한 채 민간인들끼리 함께 겨룬 선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민(文民)’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김영삼 정부는 ‘직업 군인이 아닌 일반 국민’의 정부였다.
그의 당선에는 물론 비판도 잇따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YS의 지역감정 조장과 색깔론 공격 등을 이유로, “김영삼 씨의 변신에 분노와 함께 서글픔이 밀려왔다”며 “그렇게 해서라도 대통령이 돼야겠다는 그의 욕망이 오히려 측은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치의 감(感)을 잡는 명수, 정치적 돌파력이 강하다”는 YS에 대한 평가처럼, 그는 분명 정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국민에게 참다운 용기와 희망과 꿈을 심어 주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 2022년 대한민국에게 희망을 건넬 스무 번째 대통령 후보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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