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임기 말 역대 대통령들의 국정 지지도는 추락했다. 주변 사람들이 비리에 휩싸이거나, 크고 작은 정책 실패 때문이었다. 이에 여당 후보들은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정책 차별성을 부각했다. 반면 역대 대통령들은 당선을 함께 한 정당을 떠나 거리를 둬야만 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지는 해와 뜨는 해. 청와대를 떠나는 역대 대통령과 새롭게 청와대에 들어오려는 대선 후보들의 사이는 어땠을까. 과연 역대 대통령은 어느 후보를 지지하고 지원했을까.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서른여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 지지다.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엔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권노갑 전 의원의 회고록도 참고했다.
1997년 15대 대선, YS는 누구를 지지했을까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당시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YS)이었다. 당시 당대표 인선은 총재가 지명하는 형태였다. 신한국당 총재이자 대통령이었던 YS가 지명한 대표는 곧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YS는 이홍구 전 대표, 이한동·이수성 등을 후보군으로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당 대표의 인선을 중요시한 이유는 무엇보다 총재인 내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원들 앞에 새로 당 대표를 내세우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내가 우리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고 있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1997년 초 국정 분위기 쇄신을 위해 대표를 교체해야 하는 사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원만하게 당을 관리해온 이홍구 전 대표에게 계속 그 역할을 맡길 생각도 있었다. 이한동·이수성 씨도 대임을 맡는다면 훌륭하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김영삼 회고록 下, 305~306쪽.
고민 끝에 YS가 지지한 인물은 이회창 전 국무총리였다. 이회창은 문민정부 시절 감사원장 및 국무총리로 박탈됐으며,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대표로 지명된 지 4개월 후,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9명의 대통령 후보 가운데, 2차 결선 투표에서 2300표 차로 이인제를 꺾고 최종 당선됐다.
그러나 곧바로 이회창은 두 아들에 대한 병역 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신한국당 당내 경선이 끝나자, 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공세를 퍼부었다. 전당대회 직후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얻었던 이회창은 병풍(兵風)으로 20%대로 급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상황이 뒤바뀌었다. 후보 리스크가 발생하자, 2위로 밀려났던 이인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인제는 직·간접적으로 후보 교체론을 내세웠고, 당은 이회창 대 이인제로 분열됐다. 갈등 끝에 9월 13일 이인제는 신한국당 탈당 및 대선 독자 출마를 선언하기 이른다.
‘누구를 후보로 내세우든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305쪽)’고 생각했던 YS도 후보 교체론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YS는 이인제의 탈당을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회고록에 기술했다. 특히 그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경선에서 김대중 후보(DJ)에게 패배하고도, 약속대로 DJ의 당선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최선을 다했다는 경험을 들려주며 설득했다고 언급했다.
나는 8월 27일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청와대로 불러 단둘이서 점심을 하면서 대통령 선거 독자 출마를 강력히 만류했다. 이날 회동에서 나는 “12월 대선에서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당력이 집중돼야 하며, 이 지사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 노력해 주기 바란다”며 독자 출마를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下, 328쪽.
그러면서 YS는 이인제 탈당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이회창을 지목했다. 그는 이인제를 끌어안으려는 이회창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인제 지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나의 설득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이인제 지사를 끌어안으려는 이회창씨 본인의 노력이었다. 이에 이회창 후보 본인이 이인제 지사를 직접 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중략) 전당대회가 끝난 후 나는 매주 한 번씩 이회창 대표와 주례 회동을 할 때마다 이인제씨를 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설득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했다.
(중략) 나중에는 내가 이회창씨에게 이런 얘기까지 했다. “지금 이인제는 당신 머리 위에 있다. 여론조사를 보아도 당신은 지금 이인제씨에 비해 형편없는 열세인데, 하루빨리 이인제씨를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만나야 한다. 빨리 이인제씨를 만나라. 만나서 약속해라. 이회창씨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든 무엇이든 이인제씨가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고 하라.”
내가 이렇게까지 일러주었는데도 이회창은 “가겠다”는 말만 하고 끝내 이인제씨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말을 물가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것처럼, 본인이 시행하지 않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下, 329~331쪽.
이회창을 지지했던 YS지만, 후보 교체론이 대두된 이후 신뢰가 악화됐다. YS는 “이인제를 비롯한 당내 비주류들을 추스르고 끌어안지는 못했다”며 “이회창씨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력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333쪽)”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회창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이인제를 찾아가 만나고자 무척 노력했다고 반박했다.
나는 이인제 지사를 찾아가 만나고자 무척 노력했다. (중략)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협력을 구하고 함께 3김 시대 후의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자고 말했다. (중략) 하지만 그는 나의 제의에는 즉답을 하지 않고 당 개혁안만 얘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가기로 이미 결심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 이회창 회고록2, 162쪽.
이인제의 탈당에 따른 위기 속에 YS는 이회창에게 당 총재직을 조기 이양 방침을 밝혔다. 조기 이양을 통해 이회창 체제로 안정시키고, 당내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이회창도 계파에 관계없이 각계 세력을 모두 포용해 당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후 YS와 이회창은 IMF 경제 위기 및 DJ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충돌하면서 갈라섰다. 이회창은 경제 위기에 대해서는 “정부가 위기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필요한 개입 정책을 써야 하는데도 기본적 경제 지표가 괜찮다는 이유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174쪽)”고 비판했다.
또한 YS가 DJ의 비자금 수사 중단을 발표하자, 이회창은 “집권당 후보가 정치 혁신의 카드로 내세운 비자금 폭로를 집권당의 대통령이 뒤엎어 버리는 것은 나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한 것(175쪽)”이라 봤다.
그러나 YS는 “대통령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 김대중씨의 부정축재를 수사하게 되면 전라도 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 대선을 치를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며 “이회창씨의 생각은 경쟁자를 선거에서 배제하려다가 선거 자체를 없애 버리게 될 무모한 발상이었다(343쪽)”고 반박했다.
결국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회창은 YS에 탈당을 요구하며 홀로서기를 택했다. 이에 YS는 반발하며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김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했지만 그와의 결별까지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당의 명예총재로 있고 당내 민주계 세력의 대부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당의 대선 후보인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훼방만 하고 있으니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
- 이회창 회고록2, 178쪽.
10월 21일 검찰이 비자금 수사를 유보하겠다고 발표하자, 이회창 후보는 바로 다음날인 22일 기자회견을 갖고 명예총재인 나의 탈당을 요구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터뜨리더니, 이제는 내가 만든 당에서 날 보고 나가달라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흔들리는 지도력을 수습하고 당을 결속시켜야 할 판국에 당을 또다시 내분으로 내모는 발상이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下, 347쪽.
이렇듯 신한국당 내부 분열과 당 후보와 대통령 간의 갈등 끝에, 대선 승리는 DJ에게로 넘어갔다.
2002년 16대 대선, DJ는 누구를 지지했을까
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이었다.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일곱 명의 후보 중 ‘이인제 대세론’이,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대세론’이 앞서던 상황이었다.
한나라당은 예측대로 이회창이 대선 후보로 선출됐지만, 민주당은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예상과 달리 이인제를 꺾고 노무현이 당선되면서, 이인제는 김대중-노무현의 밀약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DJ는 이러한 의혹에 전면 맞섰다. 15대 대선에서 YS가 이회창을 당대표로 지명하며 지지 의사를 밝힌 것과는 달리, DJ는 선거 중립을 강조하며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일부 주자들이 나와 노무현의 밀약설을 퍼뜨리며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전혀 후보 선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4월 29일 노 후보를 만났다.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할 때 정치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중략) 앞으로도 국정 과제 마무리에 전념하겠습니다.”
(중략)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기로 결심했다. 선거 중립을 지키고 국정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중략) 그렇게 내 정치 인생이 담겨 있었던 민주당을 떠났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478~479쪽.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경쟁자였던 이인제 측의 의혹 제기에 반박하며, DJ에 대해서도 “선거 개입 시비를 우려해 말을 극도로 아꼈다”고 회고했다.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이 비밀리에 노무현을 지원했다며 아무 근거도 없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중략) 그는 경선을 포기했고 선거전이 한창이던 11월 민주당을 탈당했다.
(중략) 4월 29일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따뜻한 축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야당의 선거 개입 시비를 우려해 말씀을 극도로 아끼셨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85~186쪽.
15대 대선 때는 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이 YS에게 탈당을 요구한 반면, 16대 대선에서는 DJ가 직접 탈당 의사를 밝혔다. 노무현은 이를 “나쁜 관행”이라 회고하면서도, DJ에 대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 비리 사건과 권노갑 고문 등 측근들의 구속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을 극복하려면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소위 차별화 전략을 쓰자는 말이었다. 나는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승계한다는 입장을 누차 밝힌 이상 그런 ‘정치쇼’는 옳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민주당을 탈당했다. 5월 5일, 일요일의 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막 선출된 후보와 민주당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1987년 이후 대통령은 모두 임기 후반에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여당 대통령 후보들은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선거 전략을 썼다. 대통령들은 집권당을 떠났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게 되었다. 책임정치의 원리에 어긋나는 아주 나쁜 관행이다.
(중략)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였다. 우리 역사에 그런 지도자는 없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88쪽.
DJ의 측근 권노갑 역시 동교동계가 노무현을 지원했다는 사실에 반박했다. 권노갑은 “DJ는 그런 분이 아니”라며 “국정 지지도가 하강기에 있던 청와대엔 그렇게 여론을 움직일 만한 여유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노무현 후보의 광주 돌풍에 대해 당시 당 안팎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나 동교동계가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돌풍을 일으킨 것은 영남 후보를 통해 영호남간의 지역갈등을 치유해보자는 호남 유권자들의 바람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선 도중 이인제 후보가 ‘음모론’을 거론하며 경선을 포기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를 지지하라, 말라 하는 얘기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중략) 그의 말인즉 대통령과 박지원 실장이 방송을 동원해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국정지지도가 하강기에 있던 청와대엔 그렇게 여론을 움직일 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 권노갑 회고록 <순명>, 184쪽.
2007년 17대 대선, 노무현은 누구를 지지했을까
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당시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획득하고 노무현 탄핵을 막아냈지만, 임기 말 참여정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5년 두 차례의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 모두 한나라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경선만 승리하면 대통령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한나라당은 이명박-박근혜 양자 간의 네거티브 경선이 진행됐다. 이때 제기된 의혹은 14년 후 법원 판결 끝에 두 사람 모두 감옥에 보냈다. 그러나 최근 박근혜는 특별 사면됐으며, 이명박은 징역 17년을 확정 받고 아직 수감 중이다.
반면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탈당 후 대통합민주신당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민주신당에서는 고건 전 국무총리, 정운찬 서울대 총장,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이들의 높은 대중 인지도나 호감도만으로 승리하기 어렵다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예비 후보를 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중략) 이들을 영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나는 여러 차례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다.
사실 인물만 보면 모두 능력 있는 분들이다. (중략)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정치에 들어와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략) 높은 대중 인지도나 호감도만 믿고 밥상이 다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자세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94쪽.
결국 민주신당 경선에는 9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이 가운데 4인이 탈락하고 2인이 사퇴하면서, 본선 경선 후보는 최종적으로 손학규·정동영·이해찬 3명이 남았다. 영입하려 했던 문국현은 창조한국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다. 최종적으로 정동영이 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당선됐다.
역대 대선 최저 투표율로 이명박이 당선됐다. 노무현은 참여정부의 실패에 따른 대선 실패에 미안함을 표하면서도, 17대 대선을 “사실상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정당정치와 선거의 기본 원리가 다 무너진 선거였다. 노무현이 잘못해서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비난을 숱하게 들었다. 대통령이 인기가 없으면 여당 후보가 불리하다는 상식에 비추어 옳은 비판이다. 미안하고 할 말이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중략) 그 선거에는 사실상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다 책임지겠다는 후보가 아무도 없었다. 근거도 없는 ‘경제파탄론’ 앞에서 먼저 반성한다고 말해 버렸으니 무엇을 가지고 선거를 할 것인가.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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