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젊음의 계절이련가 [일상스케치(90)]
스크롤 이동 상태바
여름, 젊음의 계절이련가 [일상스케치(90)]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8.13 1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춘들이여, 젊음을 귀히 여기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활기 넘치는 청춘들이 젊음의 열기를 뿜어내는 시원한 여름날의 현장. ⓒ연합뉴스
활기 넘치는 청춘들이 젊음의 열기를 뿜어내는 시원한 여름날의 현장. ⓒ연합뉴스

어느새 여름날은 멀리 사라졌다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가슴을 활짝 열어요
넝쿨장미 그늘 속에도 젊음이 넘쳐 흐르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갈숲사이 바람이 불어 한 낮의 더위를 씻고
밤이 오면 모닥 불가에 우리의 꿈이 익어요

70년대 해변가요제 1회 대상곡인 징검다리의 '여름'이라는 노래의 일부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하는 구절이 유독 인상적이다. 나에게도 젊음의 상징인 여름날이 있었다.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학창시절 여름엔 작열하는 태양에도 아랑곳 않고 친구들이랑 수시로 어디론가 떠났다. 젊은이들에게 전국을 누비는 여름휴가는 당연지사 통과의례이자 특권이다. 그러니 청춘 그 자체로 멋지고 젊음의 열기가 폭발한다.

하지만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들고 보니 아쉽고 부러울 뿐 그림의 떡이다. 긴 장마와 폭염, 태풍 같은 일기 탓에 외출 삼가라는 메시지를 연일 받으며 무조건 건강이 최우선인 나잇대가 되었다. 매년 불볕 같은 더위에도 아들네가 손주들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떠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만감이 교차하며 젊은 날의 추억에 잠긴다.

그땐 그랬지

지금은 반세기를 지난 과거에 비하면 세상은 미래 상상 속의 마치 SF 영화처럼 변모하였다. 따라서 삶과 여행의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과거 우리 때는 기껏해야 서울 근교 청평과 대성리, 강촌 등이 옛 경춘선 열차가 다닐 때 젊은이들의 MT 성지였다. 요즘처럼 승용차나 KTX는 꿈도 못 꾸고, 신용카드 대신 젊음을 무기로 통기타 한 자루 어깨에 메면 완벽 그 자체였다.

장거리 여행이 가능한 방학이 되면 나를 포함하여 지방에 본가가 있는 친구들 집이 첫 번째 여행지였다. 지금이야 해외 배낭여행이 다반사로 모든 것이 풍부한 세상이지만, 해외여행 자유화는 먼 세상 이야기고 팍팍한 주머니 사정에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는 친구네가 적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관광지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렇다 보니 지리산과 섬진강이라는 주옥같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탓에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여름이면 문전성시를 이뤘다. 나이 많은 사촌 오빠 언니부터 시작하여  층층이 자라면서 또 다른 사촌 오빠들 역시 친구들과 함께 외갓집을 찾았다. 아버지는 계곡 물놀이 데리고 다니느라, 할머니와 엄마는 식사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셨다.

그 사이 바통터치하여 내가 중학생이 되어 타지로 나가면서 중학교 친구들부터 대학시절까지... 그 역사가 길다. 약속된 친구들의 방문 외에 갑작스러운 사태도 발생했다.

휴대폰은 존재 조짐도 없던 그 시절, 대학교 1학년 때 호기롭게 지리산에 올랐다 며칠 동안 길을 잃고 헤맨 우리 과 남학생들. 물어물어 거의 거지 행색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 역시 진주로 친구들 만나느라 부재중이었는데, 내 이름 석 자를 팔아 친구들은 목욕을 하고 짬뽕 곱빼기를 얻어먹은 후 차비를 빌려 다음 행선지로 떠났단다. 어느 날은 마당으로 불쑥 들어온 또 다른 남학생 무리들. 역시나 지리산을 등반하고 와서 짬뽕 곱빼기를 먹고 차비를 빌려 갔다.

나이 차 많은 막냇동생이 자라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교수님을 모시고 대학원생들 단체 하계 워크숍을 위해 지리산을 목적으로 지나다 들렀다.

참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남기고 지나간 그 시절, 돌이켜 보면 행복했다. 그리고 나의 결혼 후 아이들과 들르면서 부모님은 여전히 손주들 뒤치다꺼리까지. 이렇듯 내 고향집은 방앗간처럼 수많은 참새들이 쉬어갔다. 끝이 없었다.

이젠 추억을 먹고 산다

할머니는 물론이고 부모님마저 세상을 뜨고 이젠 추억만이 남았다. 물론 성인이 우리 아이들은 역시 친구들과 어린 시절 옛 기억을 되새기며 하동 송림과 쌍계사 계곡을 찾는다.

그런데 그땐 몰랐다. 손님맞이에 정성껏 대해주셨지만 부모님은 힘든 행사였다는 것을. 긴 긴 세월 주변인들 맞이에 전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나이가 되면서 부모님의 노고를 깊이 알게 된다. 나는 그저 한번씩 손주들 돌봐주면서 말이다.

할머니는 한일합방과 일본강점기를 거쳐 6.25와 모든 대한민국 근현대 시절을 겪었다. 아흔이실 때 '참 좋은 세상이다,10년만 젊었으면 좋겠다'라고. 난 내심 80이나 90이나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 역시 이 나이에 10년만 젊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니까.

젊음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청춘이여, 현재를 감사히 여기고 힘들더라도 젊음 그 자체를 즐기며 그리고 내일을 충실히 채우길. 꿈과 희망이 넘치는 시간이 지나면 낙엽 지는 가을이 온다는 걸 잊지 말고.

다사다난했던 여름이 저물어간다. 입추를 지나 처서를 향해 가자 더위가 한풀 꺾인 듯하다. 인생도 마찬가지. 영원할 것 같은 젊음도 서서히 멀어질 것이다.

곱게 물든 단풍이,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 감탄하는 시간이 한 해 한 해 반복될수록, 가는 여름도 매정하고 다가오는 가을도 서글퍼진다는 걸 알게 되리니.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