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때 방송법 개정 추진했던 민주당, 문재인 정부 들어서자 말 바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전례 없는 대치 상태다. 제22대 국회가 파행을 이어가고 있다. 끝없는 갈등에 아직 개원식도 열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야당과 ‘거부권’으로 대응하는 정부여당이 합작한 헌정사의 오점이다.
이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나섰다. 우 의장은 7월 17일 제헌절 오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방송법을 둘러싼 여야의 극한 대치가 내부의 갈등을 넘어 심각한 국론분열로 이어지고 있다”며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야당에겐 방송 4법 입법 강행 중단과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소추 중단을, 정부여당에겐 공영방송 이사진 선임 일정 중단과 파행적 방통위 운영의 정상화 조치를 촉구했다. 아울러 방송법 논의를 위한 범국민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우 의장이 유독 방송법을 언급한 덴 이유가 있다. 여야 모두 ‘할 말이 없는’ 현안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내가 여당일 땐 나쁜 법 남이 여당일 땐 착한 법’이 되는 게 방송법이다.
방송법 개정 핵심은 “정치권 손 떼”
방송 4법은 내용상 방송 3법과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방통위 설치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방통위 설치법 개정안은 의사 정족수를 ‘위원 4인 이상’으로 규정하는 법안이라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크지 않다.
방송법 논쟁의 핵심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골자로 하는 방송 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이다. 한국방송(KBS)·문화방송(MBC)·교육방송(EBS)의 이사회 구조와 이사 추천 권한, 사장 선출 방식 등을 바꿔 정치권의 영향을 줄이자는 취지의 법안이다.
현재 KBS 이사회는 11명,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와 EBS 이사는 각각 9명이다. 그리고 KBS 이사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하고, 방문진과 EBS 이사는 방통위가 임명한다.
문제는 방통위원 5명을 정부와 국회가 추천한다는 점이다. 방통위원장을 포함한 방통위원은 대통령 임명 몫이 2명, 국회 추천 몫이 3명이다. 여기서 국회 추천권은 야당이 2명, 여당이 1명을 갖는다. 결국 방통위원은 여권에서 3명, 야권에서 2명을 추천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정부여당의 입김이 방통위에 작용하고, 방통위가 임명하는 KBS·MBC·EBS 이사도 정부여당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다. 실제로 KBS 이사 11명은 여권 추천 7명 야권 추천 4명, 방문진과 EBS 이사 9명은 여권 추천 6명 야권 추천 3명으로 구성되는 게 관행이었다.
방송 3법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현행법으로는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 선임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사 수를 21명으로 늘려 이사 추천권을 국회(5명), 시청자위원회(4명),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6명), 방송기자연합회(2명), 한국PD연합회(2명),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2명) 등으로 분산시키자는 주장이다.
공영방송 사장 선임의 경우에도 성별·연령·지역 등을 고려한 일반시민 100명이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에서 직접 사장 후보를 추천하도록 하고, 이사회가 재적 이사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방송 3법의 요체다.
이 같은 방송 3법을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공영방송 사장 선임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을 줄이고 국민들께 추천 권리를 돌려드리자는 것”이라면서 “언론의 독립성과 민주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법안”이라고 강조한다.
말 바꾼 文 정부…순수성 의심하는 與
그러나 정부여당은 민주당의 ‘순수성’을 의심한다. 이미 언론계에 민주노총의 영향력이 강해진 상태에서, 이사 추천권을 언론 유관기관에 부여한다는 건 ‘방송 장악’을 위한 의도라는 비판이다.
의심의 근거도 있다. 2016년. 민주당은 여야 추천 공영방송 이사의 비율을 7대6으로 바꾸고, 대통령에게 공영방송 사장을 임면 제청할 때 재적 이사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을 준비했다.
공영방송 이사 비율이 여야 7대6이고, 재적 이사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다는 건 공영방송 사장 임면 시 여당이 야당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의미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중립적인 사장을 세우기 위해 마련한 법안이었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서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방안을 입법을 통해서 강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얼마 후 문 대통령은 입장을 바꿨다. 그는 2017년 8월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만약 이 법안(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어느 쪽에서도 비토(거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선임되지 않겠는가.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법안을 재검토하라는 의미였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 민주당 태도도 변했다. 민주당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토의 결과, 대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조만간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을 만나 논의하겠다”고 했다.
이후 방통위는 ‘방송미래발전위원회’를 구성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의견서’를 국회에 냈다. 그러나 제20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폐기됐고, 민주당이 거대여당이었던 제21대 국회에서는 방송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당이 다시 방송법 개정에 나선 건 2022년 3월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후였다. 방송법 개정이 ‘언론의 독립성과 민주성을 강화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자기 쪽 사람을 앉히기 위한 방안’으로 의심받는 이유다.
여야 모두 ‘내로남불’…방송법 개정 가능할까
물론 국민의힘도 ‘내로남불’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방송법 개정에 미온적으로 나오자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해 공영방송을 국민에게 돌려주자’고 주장했던 당사자가 국민의힘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문 대통령의 ‘소신 없는 사람’ 발언 직후 “정권을 잡고 방송장악이 그렇게 달콤했나”라며 “공영방송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방송법 개정안에 즉각 합의하고 민생을 위한 국회로 돌아오라”고 했다.
바른미래당 역시 “방송법 개정안은 야당 시절 민주당이 발의하고 의원 162명이 동의한 법이다. 한국당도 찬성 입장으로 바뀌었다”며 “내로남불 태도를 바꾸고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범국민 협의체를 구성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논의하자는 우 의장의 제안을 “공영방송 이사진 선임 일정 중단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현행법에 따라 (이사가) 임명돼왔다”는 이유지만, 자신들이 비판했던 문재인 정부의 행태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방송법 문제에 대해 심영섭 경희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는 “날카로운 칼을 내가 갖고 있으면 무기지만 상대가 갖고 있으면 흉기인 것처럼, 야당 때는 흉기라고 말하고 여당 때는 정당한 공권력을 수행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라며 “이건 안 변한다”고 단언했다. ‘내가 하면 좋은 개정 남이 하면 나쁜 개정’인 방송법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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