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7월 31일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습니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인사 브리핑에서 “노동 현장‧입법부‧행정부 등을 두루 경험한 김 후보자야말로 다양한 구성원 간 대화, 타협을 바탕으로 노동개혁 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지명 배경을 설명했는데요. 야당과 노동계는 “천인공노할 인사 참사”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사실 김 후보자는 ‘노동운동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 시절 공장에 위장취업한 뒤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하는 ‘위장취업 노동운동’의 시초가 바로 김 후보자죠. 심지어 이런 노동운동을 20년 이상 지속했고, 옥살이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두 번의 제적과 두 번의 옥살이로 인해 대학을 졸업하는 데 무려 24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하죠. 그야말로 젊음을 노동운동에 바친 셈입니다.
이러다 보니 노동운동가들 사이에서 김 후보자는 ‘노동투쟁의 신화’였습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김 후보자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았고, 그의 연설문을 돌려 읽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 역시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며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같은 선배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도 김 후보자를 ‘아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이재오 전 의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등과 손을 잡고 재야 세력, 노동운동 세력을 규합해 민중당을 창당했습니다.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노동운동을 제도권 내에서 이어가기 위해서였죠. 여기까지만 보면 야당과 노동계가 김 후보자 임명을 반대하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노동운동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진보정당 정치인보다도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 김 후보자니까요.
김 후보자의 삶이 뒤바뀐 건 1992년 제14대 총선 이후입니다. 민중당은 이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채 득표율 미달로 해산됩니다. 같은 해 열린 제14대 대선에서도 민중후보로 추대된 무소속 백기완 후보가 득표율 1%에 그치면서 참패하고 말죠. 이 두 번의 선거를 통해 김 후보자는 인식에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과거 김 후보자의 인터뷰를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우리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위해 우리가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귀영화나 출세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그래서 마흔 살 이전에 혁명의 길을 가다가 죽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했던 생각과 노선이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감옥에도 갔고, 하는 것마다 다 잘 안 됐으니까요. 그런데 잘 안 되는 원인을 따져 보니, 제 생각이 잘못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에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를 변절자라고 하는 분들의 비판은 다 받아들입니다.”
두 차례 선거 이후 김 후보자는 1년 동안 택시운전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1994년 김영삼(YS)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죠. 김 후보자의 민자당 입당은 진보진영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당시만 해도 운동권 인사들이 보수로 전향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 주인공이 ‘김문수’라는 게 문제였죠. 이때부터 김 후보자는 진보진영과 노동계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세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경기도지사를 지내는 동안에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 이념과 무관하게 호평을 받았죠. 특히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대중교통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며 ‘노동운동의 전설’이었던 과거가 재조명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진보정당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의 최초 기획자가 바로 김 후보자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대권을 노리면서 김 후보자와 진보진영 사이의 거리는 좁힐 수 없을 만큼 멀어집니다. 보수정당에서 대권 후보가 되기 위해선 강성보수의 지지가 필요한데요. 이를 위해 강한 보수색채를 뿜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엔 친박(친박근혜) 행보를 보였고, 탄핵 국면에선 탄핵 반대 집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더더욱 ‘우클릭’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태극기 세력’이 보수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광훈 목사와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김 후보자의 ‘노동관’ 역시 노동계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했던 김 후보자가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어낼 적임자라며 그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는데요. 그는 2022년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김문수TV에 ‘불법 파업에 손배 폭탄이 특효약’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려 “노동자들이 손배소를 가장 두려워한다”며 “민사소송을 오래 끌수록 굉장히 신경 쓰이고 가정이 파탄 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지역 상생형 일자리 모델인 광주글로벌모터스를 방문한 뒤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조가 없습니다. 현장에서 핸드폰은 보관하고 사용할 수 없습니다. 평균임금은 4000만 원이 안 됩니다(현대·기아차의 40%정도)”라며 “감동 받았습니다”라고 말해 노동계의 빈축을 샀습니다.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젊은 시절의 김 후보자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발언입니다. 오히려 ‘반(反) 노조’에 가까워 보이는 게 사실이죠.
김 후보자가 ‘노동개혁 적임자’인지 ‘반노동 최첨병’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를 겁니다. 다만 ‘노동운동의 전설’이었던 그가 ‘노동계의 적’이 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과연 김 후보자는 야당과 노동계의 극렬한 반대를 뚫고 고용노동부 장관 자리에 올라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노동개혁을 완수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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