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린 한동훈, 이젠 ‘공생의 길’ 찾아야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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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돌린 한동훈, 이젠 ‘공생의 길’ 찾아야 [기자수첩]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4.10.19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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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은 국정에 공동 책임…‘나만 옳다’ 버리고 공통분모 찾아 조금씩 전진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의도에서 일하는 300명만 쓰는 고유의 어떤 화법이나 문법이 있다면, ‘여의도 사투리’ 아닌가. 저는 나머지 5000만 명이 쓰는 문법을 쓰겠다.”

2023년 11월.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밀하게 계산되고 의뭉스러운 ‘정치적 언어’ 대신, 일반 국민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쓰겠다는 포부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 달여 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으로 취임하면서 여느 정치인들과는 다른 연설을 선보이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한 대표에 대한 기대감은 처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석됐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대표의 과도한 자신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한 대표가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한 대표는 ‘여의도 사투리’가 아닌 ‘5000만의 언어’를 쓰겠다고 했지만, 사실 정치인들이 여의도 사투리를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치는 갈등의 조정인데, 갈등이라는 게 꼭 선악(善惡)으로 나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명신(名臣) 황희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옳고, 너도 옳다’라고 해야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정치의 존재 이유고, 여의도 사투리가 없어지기 힘든 이유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대표는 이런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 것 같습니다. 지난 1년여 간의 행보를 보면 그렇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2년 반이나 남았습니다. 당연히 윤 대통령도 대통령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많을 겁니다. 또 여당 의원들은 여당 의원들대로, 야당 의원들은 또 야당 의원들대로 가진 포부가 있을 겁니다.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원하는 바가 있을 테고요. 한 대표 역시 나름대로 욕심이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 한동훈’이 해야 할 일은 이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의 계획과 국민의 요구 사이에서 접점을 만들고, 여당 의원들을 리드하면서 야당 의원들의 협조를 이끌어내 ‘일이 되게 만드는’ 역할을 했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의뭉스러운 ‘여의도 사투리’를 동원해서라도 모든 주체가 각자의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들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내야 했죠. 

하지만 한 대표가 한 일은 ‘자신의 길’을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욕망을 인정하고 조정하기보다, 자신의 판단만을 신뢰하며 ‘마이웨이’를 계속했습니다. 대통령을 비판하고 야당을 비판했지만, 그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은 없었습니다. 한 대표가 여당 대표를 맡고 난 뒤 정부와 여당, 야당 사이에 의사의 합치가 이뤄졌던 사례가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10·16 재·보궐선거에서 한 대표는 ‘텃밭’을 사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한 대표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재보선 결과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처럼 타인의 욕망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나만 따르라’고 외쳐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쇄신은 쇄신대로 하되, 여러 주체들의 공통분모를 찾아 성과를 이루려는 노력도 병행해야 합니다. 그게 정부가, 여당이 할 일입니다.

한 대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그가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틀린 말을 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쩌면 한 대표는 정치권의 그 누구보다도 명석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정답을 맞히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각자의 목표를 가진 플레이어들로부터 가능한 많은 지지를 얻어내야 승리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그 수많은 비판 속에서도 왜 ‘여의도 문법’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한 대표가 한 번쯤 곱씹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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