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앞두고 계속된 수사에 한나라당, ‘관건선거’ 주장하며 탄핵안 발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김태정 검찰총장은 문민정부 마지막 검찰총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이었던 1997년 8월, 김기수 검찰총장의 사의를 수용하고 후임에 김태정 법무부차관을 임명했다. 김태정 총장은 문민정부 초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내며 사정수사를 지휘하는 등 여당과 인연이 깊은 인사였지만, ‘호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도 기대를 건 인물이었다.
“국민회의는 7일 오전 신임 검찰총장에 호남 출신의 김태정 법무차관이 임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상당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특히 신임 김 총장이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와 같은 경기고 출신의 최영광 법무연수원장을 제치고 검찰총수에 오른 것에 주목했다.
국민회의는 정부의 8·5개각 발표 이후 검찰 내 ‘K1(경기고) 인맥’의 전진 배치에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워왔다.
당장 대선을 앞두고 검찰의 선거중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국민회의는 이 때문에 부산태생이긴 하지만 광주에서 고교를 졸업해 호남 인맥에 가까운 데다 야당 인사들과도 두루 교분을 맺고 있는 김 총장의 임명을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 정동영 대변인은 ‘해방 이후 호남 출신이 검찰총장에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냐’고 말했다.
여권 인사의 인물평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검사 출신의 박상천 총무도 김 총장을 ‘활달하고 업무추진력이 뛰어난 인물’로 표현하고 ‘적어도 검찰 내에서는 합리적인 평을 들을 것’이라고 호평했다.”-1997년 8월 8일 <경향신문> ‘선거중립’ 기대 내심 환영…국민의힘 반응
실제로 김태정 총장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제15대 대선을 중립적으로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중립적’이라는 평가 속에는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은 김대중 후보가 처조카를 통해 670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고 주장했는데, 검찰이 이에 대한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7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은행 지점장이던 처조카 이형택(55) 씨를 통해 670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고 주장한 데 대해 국민회의가 즉각 ‘사실무근’이라며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고 이 씨도 비자금 관리설을 부인하고 나서 여야의 정면충돌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강삼재 총장은 이날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총재가 자신의 처조카 이형택 씨를 시켜 365개의 가·차명 및 도명 계좌를 통해 670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 총재의 비자금 수백억 원이 동화은행에 유입돼 있다는 제보에 따라 확인한 결과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인 이 씨가 90년부터 7년 동안 김 총재의 친인척 및 자신의 친지 명의로 개설한 가·차명계좌 349개를 통해 김 총재의 비자금 295억1275만 원을 관리해 왔음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 총재는 자신이 노태우 전 대통령한테서 받았다고 고백한 20억 원 외에 90~91년 적어도 6억3000만 원을 추가로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며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에서 돈이 인출된 전산자료를 공개했다. (후략)”-1997년 10월 8일 <한겨레> DJ비자금 670억설 파문
“김태정 검찰총장은 21일 신한국당의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 대한 비자금 의혹 고발사건 수사를 15대 대통령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 총장은 이날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과거의 정치자금에 대해 정치권 대부분이 자유스러울 수 없다고 판단되는 터에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극심한 국론 분열, 경제 회생의 어려움과 국가 전체의 대혼란이 분명하게 예상된다’고 수사 유보 이유를 설명했다. (중략)
이에 대해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 측은 ‘청와대 음모설’을 제기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 총재의 측근 의원들은 이날 오후 여의도 후원회 사무실에서 이 총재 주재로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돌연한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이 검찰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 행보를 가속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 총재는 22일 별도의 기자회견이나 출연이 예정된 SBS 토론을 통해 검찰의 수사 착수를 강력히 촉구하고 ‘자료가 나올 경우 92년 대선자금의 조사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후략)”-1997년 10월 22일 <동아일보> 검찰 ‘DJ비자금’ 수사 유보…이회창 총재 강력 반발
이후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검찰은 예정대로 김대중 당선인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검찰은 김대중 당선인의 비자금 수수 의혹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오히려 신한국당이 폭로자료를 입수한 경위에 대해 문제 삼으면서 이회창 한나라당 명예총재를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회창 명예총재가 검찰조사에 불응하자, 김태정 총장은 이회창 명예총재를 겨냥해 ‘그 양반은 법조인 출신이라기보다 자기 인기관리만을 위해 교묘하게 여론을 이용하는 타고난 정치인’이라며 비난하기에 이른다.
“김태정 검찰총장이 2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비자금 의혹 사건’ 수사와 관련, 한나라당 이회창 명예총재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한나라당은 이에 강력 반발했다.
김 총장은 이날 오전 이 명예총재가 검찰의 서면조사 요구에 계속 불응하고 있는 데 대해 김윤성 대검 공보관을 통해 ‘그 양반(이 명예총재 지칭)은 법조인 출신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인기관리만을 위해 교묘하게 여론을 이용하는 타고난 정치인이다’고 비난했다.
검찰총장이 수사 도중 특정인에 대해 공개리에 비난 성명을 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맹형규 대변인은 ‘검찰이 이 명예총재에 대해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비난하고 나선 데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한다’며 ‘이는 원내 제1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개인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한나라당 전체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맹 대변인은 ‘김 당선자가 이 명예총재에 대한 수사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나선 데 이어 벌어지고 있는 검찰의 강경한 움직임은 당선자 측이 정치보복에 착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정국 추이를 지켜보며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1998년 2월 22일 <조선일보> 김 검찰총장 “이회창 씨 여론 이용 인기관리”
김대중 당선인에 대한 무혐의 처리와 이회창 명예총재에 대한 비판은 방아쇠가 됐다. 김태정 총장의 발언이 있는 지 사흘 후, 한나라당 의원들은 김태정 검찰총장을 ‘김대중 후보 비자금 사건 수사 유보’와 ‘이회창 명예총재 공개 비난에 따른 명예훼손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 훼손’을 이유로 탄핵하겠다고 밝혔다.
“이우재·이신범·안상수·허대범 의원 등 한나라당의 초선의원 및 법사위소속 의원 15~16명은 27일 김태정 검찰총장을 탄핵소추키로 하고, 내주 초부터 이를 위한 서명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준비한 탄핵소추요구서는 △김 총장이 97년 10월 22일 아무런 법적근거 없이 정치적 판단에 따라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유보해 직무를 유기했고 △98년 2월 22일 이회창 명예총재를 공개 비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고 이 명예총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헌법 제65조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99명)의 발의와 재적과반수(148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의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 재적의원 수는 294명이며, 한나라당 의원 수는 161명이다. (후략)”-1998년 2월 28일 <조선일보> 野, 검찰총장 탄핵 서명
이런 분위기 속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같은 해 6월 치러질 제2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검찰은 한나라당 이신행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김덕룡 부총재까지도 수사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한나라당은 ‘관건선거 음모’라며 강하게 반발한다.
“‘진상규명 위한 것, 정치보복 아니다.’
지방선거전에 들어가자마자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검찰의 ‘비리 수사’가 공개됐다. 한나라당은 이를 ‘관권선거 음모’로 규정했고, 국민회의는 ‘법치주의’라고 맞섰다. 당사자인 한나라당 이신행 의원은 단식투쟁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검풍’이 지방선거 초반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21일 선거대책위원회에서 ‘검찰이 선거를 앞두고 지구당위원장인 이 의원을 소환하고 서울시장선거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덕룡 부총재에 대한 소환설을 유포시키는 것은 명백한 관권선거 음모’라고 규정, 이 의원에게 출두를 거부토록 하는 등 강경대응키로 했다. (후략)”-1998년 5월 22일 <조선일보> 지방선거판에 ‘검풍’ 몰아친다
결국 한나라당은 1998년 5월 26일 소속 의원 149명 전원의 이름으로 김태정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대선 과정에서부터 쌓이고 쌓인 앙금에, ‘선거 시즌’이라는 시기적 특수성이 결합된 탄핵소추였다.
“한나라당은 26일 소속 의원 149명 전원의 이름으로 김태정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나라당은 탄핵소추안에서 ‘김 총장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공천이 선거법에 위반되는데도 수사를 하지 않아 직무를 유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신행 의원에 대한 혐의 사실을 언론에 유포하는 등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1998년 5월 27일 <한겨레> 검찰총장 탄핵소추안 제출
그러나 김태정 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지방선거가 끝나자 유야무야됐다가 시한 만료로 폐기됐다. 김태정 총장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탄핵 자체는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것이었던 만큼 선거 후 탄핵소추안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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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