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이행, DJ는 공고화…DJP연합 있었기에 햇볕정책도 가능”
“386, 이젠 민주주의 위협하는 주역… 사람이 아니라 '정부'가 문제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촛불시위 이후 한국 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으로 ‘적폐 청산’을 비롯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의 회귀’를 꼽으며, 그 책임은 ‘386 세대’로 통칭되는 진보 집단과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지난 9일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뉜 격렬한 정치 갈등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며 “탄핵을 비롯해 현재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재판을 받고 있고 투옥 중인 상황이다. 그 연유를 따질 것 없이 이 현상 자체가 정상적인 민주주의 운영이 아닌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촛불시위의 결과로 출현한 문재인 정부가 위기를 가져왔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며 “1세대 민주주의 지도자(김영삼과 김대중)들의 시대가 지나고,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에 뛰어든 한국 정치 엘리트 계급들이 한국 정치를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기 상황이 벌어진 것은 커다란 역설”이라고 지적했다.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 강연자로 초대된 최 교수는 이날 기조강연에서 DJ의 리더십과 국민의정부의 업적을 평가하고,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는 정치 현실을 다각도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YS는 이행, DJ는 공고화…DJP연합 있었기에 햇볕정책도 가능”
최장집 교수는 “DJ는 한국 민주주의를 공고화 시킨 정치지도자”로 정의하면서 “97년 대선에서 DJ의 당선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큰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2010년대 이른바 ‘아랍의 봄’ 이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던 여러 나라들을 살펴보면, 튀니지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들에게서 다시 권위주의가 복원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공고화는 갓 민주화된 나라에서 체제를 권위주의로 돌릴 수 없도록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한국 민주화의 특성은 기타 선발 민주주의 국가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이미 국가 기반의 틀이 만들어진 후에 민주주의가 됐다. 분단국가 이후 행정 관료체제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고, 1960~70년대 권위주의적 ‘박정희 산업화모델’로 경제발전도 성취했다. 요컨대 강력한 보수 기반이 안착된 뒤에 민주화가 됐기 때문에, 구세력과 구질서를 바꾸기엔 더 어려웠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DJ가 민주주의를 공고화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YS가 ‘군부 권위주의’로부터 ‘민간 민주주의 정부’로 권력을 이행시켜 그 터를 잡았다면, DJ는 이를 공고하게 다진 사람이다. 즉 YS가 ‘이행의 지도자’라면, DJ는 ‘공고화의 지도자’다.”
최 교수는 DJ가 ‘민주주의 공고화’에 성공한 이유는 ‘이상주의 민주화 운동론’에서 벗어나 ‘현실주의 민주화 통치론’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봤다. 다시 말해 DJP 연합 등을 통해 권위주의 세력을 끌어안은 덕분에, 햇볕정책이나 시장경제 발전 등 ‘DJ의 업적’으로 꼽히는 정책들도 실현가능했다는 것이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두 정당의 연대(DJP)를 통해 DJ는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호남 지역주의와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묽게 만드는 중간 단계를 거칠 수 있었다. 이러한 넓은 정치적 지지기반은 자신이 구상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표, 햇볕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이 돼줬다. DJP연합이 (운동권의 관점에선) 보수 기득권과 타협했다고 하지만, 제가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 세력으로부터 가장 박해받았던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가 짧지만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다. ‘과거를 파헤치지 말라.’ 과거의 대립과 갈등을 정치로 불러들이지 않고 서서히 사회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과거의 대립과 갈등을 정치로 불러오는 것은 그저 과거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귀하는 것일 뿐, 민주주의 이행과는 상관이 없다.
이런 것을 고려하자면 DJ는 민주화 투쟁 과정 속에서 이런 것을 충분히 이해한 듯하다. 재야의 ‘민주화 운동론’을 현실에 기초한 ‘민주적 통치론’으로 가져온 것이 바로 그의 리더십이다. 목표와 이상이 옳다고 해서 정치인의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지고 (현실과) 조절하지 않으면 공허한 레토릭이나 선동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386, 이젠 민주주의 위협하는 주역… 지금은 누가 대통령 돼도 문제”
최장집 교수는 촛불시위 이후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가져온 격렬한 정치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며, 이는 ‘386 세대’을 위시한 진보 세력들이 ‘적폐 청산’을 외치며 역사와 대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군부 권위주의 하에서 제도권 정치와 정당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고, 이때 학생 또는 재야 운동권이 제도 밖에서 민주화를 이뤄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의 주역이 됐다는 사실은 굉장한 역설로 다가온다.
운동론적 관점에서 이해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개혁 대 수구’, ‘선과 악’ 같은 대립항이다. 민주주의를 어떤 이상적이고 좋은 것, 도덕적인 것을 표상하는 이념의 형태로만 이해하는 거다.
개인적으로 조국 사태에서 ‘강남좌파’라는 단어를 굉장히 불편하게 느꼈지만, 이 합성어가 현 세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맞다. ‘386세대’는 한 세대를 지나면서 강남에 거주하는 사회 상층으로 부상했다. 애초에 한국 민주화운동은 가장 좋은 학교에서 엘리트들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변화된 현실에서 30년 전의 이론, ‘독재 대 민주’나 ‘친일 대 반일’ 등의 대립과 이상론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지금 문제가 되는 거다.”
최 교수는 현재 진보 대 보수의 극단적 대립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비롯됐다고 분석하면서, 이 문제가 청와대 정부(제왕적 대통령제)와 만나 더욱 심화됐다고 설명했다.
“사실 위기의 시작은 이명박 정부 때 부터다. MB정부가 앞선 두 진보 정권이 해낸 햇볕정책, 분배, 복지, 노동 등의 경제사회정책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정책을 폈고, 검찰수사로 전임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 (선거의) 패자 존립 자체를 위협한 거다. 결국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이러한 흐름이 박근혜 정부 탄핵을 가져온 촛불시위와 접맥됐고, 오늘의 문재인 정부를 만든 동력이 됐다.
게다가 민주화를 통해 정치공간이 새롭게 열렸다 하더라도, 정치참여의 기회는 제한적일뿐 아니라 주로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권 세력들이 정치참여의 중심이 됐다. 시민운동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제도화된 정치권을 비판할 뿐, 어떠한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진보 진영은 제도권에 속했으며 책임 소재가 분명한 ‘정당’보다 제도권 밖에 있으며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탄생시켰다.
또한 우리가 박근혜 정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청와대에 권력이 집중되면 청와대가 무능할 때 국정이 망하고 결국 탄핵을 불러온다. 이것 자체가 대화와 타협의 통치, 즉 안정적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누가 대통령이 돼도 그렇게 되는 양극화의 적대적 구조인 것이다.”
“정당이 역할 못해 운동권 나서는 것” vs “386 운동권, 이상론으로 막무가내”
한편 이날 학술회의 토론 패널로 참석한 정세균 전 국회의장과 김선욱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전 이화여대 총장), 임현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호기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등은 “최 교수의 문제의식에 대개 동감한다”면서도 일부 지점에서 반발하기도 했다.
김선욱 이사장은 이날 최 교수에게 “시민사회가 정치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이해하지만, 이들이 정치화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도 봐야하지 않느냐”며 “정당이 제 역할 못하니까, 국회가 못하니까 시민 광장으로 나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당 제도가 제대로 확립되고 정치가 제 역할을 하면 자연히 (문제는) 소멸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임현진 교수 역시 “시민사회(운동권)가 과거에 비해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정치권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다원성과 자발성이 있다”며 “우리가 정당정치 잘 안 될 때 시민사회에 다시 기댈 수 있다”고 거들었다.
이에 최장집 교수는 “같은 학생 운동권 출신이어도 의회 통해 성장한 정치인이 중심이 돼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지금 정치의 근원 문제”라며 “같은 운동권 출신이라도 (현 집권 세력은) 막무가내라고나 할까,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집단적으로 들어왔기에 문제”라고 재반박했다.
그는 이어 “저는 조국 사태를 실세 엘리트 정치인 한 사람의 일탈이라고 보지 않는다. 386 진보를 대변했던 운동권의 정치적 붕괴라고 이해한다”며 “이건 한국 정치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기다. 그동안 보수의 도덕성을 부정하며 그들을 구체제 산물로 주장했던 진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계기가 바로 조국사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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