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호성 알앤비리서치 연구소장]
유럽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롤 모델로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정부의 노동ㆍ복지 정책을 비판하거나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비교 대상이었으며 많은 사람도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여기던 곳이 바로 유럽, 그중에서도 북유럽이었다. 이에 대한 반론은 기껏해야 우리 형편이 좀 나아질 때까지 단계적으로 가자는 정도의 주장만이 존재하는 풍토였다. 우리 문화가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좋은 면만 알려졌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물밑에 묻혔으며 균형 있게 보도하는 언론도 드물었다.
난방도 제대로 못 하는 ‘노동‧복지의 이상향 유럽’
한국인의 롤 모델로 여겨지는 유럽이 신음하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노동ㆍ복지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들이 드러나고 있다. 유럽인들의 최종 소비지출이 2008년 이후 7년 넘게 늘지도 줄지도 않고 거의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가 올해는 3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겨울철 난방비 절약을 위해 추위에 떤다거나 여름철 에어컨을 제대로 켜지도 못하고 시간제로 켠다는 이야기가 어느 가난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럽인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푸드뱅크 이용자가 증가하고 저가 식품 판매 플랫폼이 성장하고 있다. 반면, 유럽인들이 즐겨 마시는 와인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해 와인 생산량과 소비량이 모두 급감, 2023년도 세계 총 와인 생산량이 1961년 이후 62년 만에 가장 낮았다. 독일에서는 육류 소비량이 1989년 조사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통계 수치가 나왔다. 식물성 식단 선호가 큰 영향이라고 하지만 대체품 시장인 식물성 육류나 우유 제품 매출 증가율이 육류 감소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이 미국을 앞선 시대였다. 이후 역전되기 시작하여 2000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이 10.2조 달러일 때 유럽은 8.6조 달러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 2008년에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미국 18.8조 달러 대 유럽 14.7조 달러로 잠시 주춤하다가 그 이후 큰 차이로 격차가 굳어졌다. 2024년 2월 현재 미국 경제 규모(GDP)는 EU보다 8.6조 달러 만큼 크며, 1인당 GDP는 두 배 이상 높다.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의 GDP의 격차가 80%, 즉 1.8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생생한 비교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1인당 GDP는 미국 51개 주중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미시시피주(State of Mississippi)보다 낮고 독일은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미시시피주는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어쩌다 최고의 나라들이 모여 있는 유럽, 한국인들의 이상향이나 다름없는 유럽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동안 유럽 경제는 1980년대 말부터 구소련의 붕괴와 독일 통일에서 비롯된 냉전체제의 해체와 함께 30~40년간 지구촌 장벽이 느슨해진 글로벌 공급망 확대와 동유럽으로의 EU 확산, 그리고 미국,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요 증가와 중국의 값싼 공급 덕에 장기간 평화로운 성장의 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9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그동안 세계 경제의 호황 등으로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던 유럽의 허약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2년 러시아가 유럽의 뒤뜰 정도로 여겨지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촉발된 에너지와 곡물 가격 중심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제2차 석유파동 이후 40여 년 만의 충격으로 기록되고 있다. 40년간의 평화가 깨지면서 그 충격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는 역시 유럽이었다. 유럽 주요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정점을 찍을 때 10% 이상을 웃돌았다. 우리나라도 정점을 찍었던 같은 해 6월에 6.3%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치이다. 에너지 위기에 더해진 고물가에 실질임금이 감소하면서 유럽인들의 삶의 질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은 2023년~2024년 2년 연속 제로성장을 할 것이 확실시된다. 12월 22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내년 상장률은 올해 0.8%보다는 높지만 1.0%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하고 2026년은 1.2%로 낮춰 전망했다. 유로존의 두 기둥인 독일과 프랑스가 경기 침체를 주도하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0.3%로 역성장을 하였으며 올해도 0.0%로 예상되며, 내년 성장률은 0.4%, 2026년은 1%의 성장률로 예측했다.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판이다. 프랑스는 내년 0.7%, 내후년 1.2%로 하향 조정했다.
과잉 복지와 변화와 혁신 외면한 업보
그러나 단순히 제로성장, 역성장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경기가 상승과 하락의 주기를 보여주는 경기 사이클이야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과 같은 것이어서 무역 전쟁과 경기 침체는 늘 있는 일시적 현상일 수 있지만, 유럽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는 변화에 둔감해지고 혁신과 창조의 발상지로서의 분위기가 실종되었다는 데에 있다. 유럽이 일시적인 쇼크가 아니라 이미 장기적인 ‘저성장의 늪’으로 빠져든 만성적인 질환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구조적인 요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성장 잠재력은 유지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데, 기존의 패러다임에 안주하거나 지나치게 전통에 의지하는 ‘선발자의 함정’에 빠지면서 1990년부터 본격화하는 디지털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는 데 실패하고 후발국들의 추격을 허용한 게 큰 요인으로 지적된다.
2023년 상반기 뉴욕 증시에서 강세를 기록한 7종목을 이르는 ‘매그니피센트(magnificent)7’에 유럽기업은 단 한 개도 없다. 모두 미국의 기업들로 엔비디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메타플랫폼스, 아마존닷컴, 알파벳, 테슬라가 매그니피센트7에 해당한다. 대부분 2000년 이후 탄생하거나 이때부터 급격히 성장한 기업들로 세계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 첨단 기업들이다. 매그니피센트(magnificent)는 ‘참으로 아름다운, 위대한' 등의 뜻이 있다. 유럽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얄미운 명칭이다. 유럽도 루이뷔통, 벤츠, 에어버스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오래된 전통적인 기업들이다.
과거 유럽은 금융서비스 산업을 비롯한 자동차, 라디오, TV, 의약품 등 당시로써는 최첨단 혁신 제품의 생산지였었고 조선, 철강, 가전, 휴대폰 등 주요 산업에서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계 50대 기술 기업 중 단 4개만 유럽에 위치해 있고 전기차는 세계 10대 모델 중 유럽산은 하나도 없다. 자동차의 본고장의 지위를 내어 줄 날도 머지않았다. 그럼에도 유럽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미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고 벤처투자 규모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여 스타트업 생태계 자체가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또 있다. 이민정책의 실패와 본격화하는 노령화 사회로 지금까지의 노동ㆍ복지 정책으로는 감당이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전통적인 제조업에 안주하거나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디지털 혁신, AI 기술 개발 등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게을리하면서 과감한 구조 개혁의 시기를 놓치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다. 이는 경제성장의 침체를 가져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금 시행되고 있는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제도도 현재의 경제성장률로는 급격히 증가하는 노령인구를 감당하는 수준이 안 되고 있다. 이민문제도 골칫거리다. 대체로 이민 1세대들은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3D 업종에 종사하는 하층 생활을 하더라도 극한의 모국 생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좋을 뿐만 아니라 강한 생활력을 지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2세, 3세로 내려오면서 불거진다.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수는 언어적, 문화적으로도 부족한 저소득층을 형성하고 끼리끼리 그룹을 지어 사회적 문제를 크게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기승을 부리는 좀도둑에 대해서는 유럽여행을 하게 되면 단골로 듣는 주의사항이다.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소매치기가 활개를 치고 있다. 폭동이나 갱단들의 영역싸움과 살해사건도 심심치 않게 뉴스를 장식하고 있으며 마약과 테러 문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회적 갈등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면서 이민에 대해 극단적인 적대 감정을 드러내는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유럽이 그동안 풍요를 누린 것은 식민지 운영에 따른 막대한 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마저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 그동안 ‘연쇄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성’으로 이어지기 힘든 국방비를 막대한 복지비용에 충당하는 데 사용하였다. 미국의 국방 우산 아래에 무임승차한 것인데, 이마저 현재 나토의 방위비 목표치인 GDP 대비 2%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세기의 도둑질(the steal of century)’이라는 표현으로 “유럽의 안전과 방위는 부자가 된 유럽 스스로 알아서 해라”면서 최소 3%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심지어 5%의 인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2%의 기준치를 충족하는 회원국은 나토 32개국 중 23개국으로, 5%를 충족하려면 대부분 회원국이 2배 이상 지출을 늘려야 하는 셈이다. 트럼프가 공언한 것처럼 유럽산 제품에 일괄적으로 20%의 관세를 부과하면, 안 그래도 비실비실 허약한 체질을 보여주고 있는 유럽의 제조업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문제는 정치…세계 석학, 진보 정치로는 위기극복 어려워
세계적인 석학 케네스 로고프(Kenneth S. Rogoff)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낮은 금리에 따른 풍부한 유동성이 투자와 소비를 이끌고, 세계가 하나의 공급망으로 엮어 저물가를 구현했던 장밋빛 시대인 ‘골디락스 시대’는 끝났다.”라고 단언했다.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지난 10월 연차총회에서 세계 경제가 ‘저성장 고착화(not-good-enough) 시기에 진입했다고 분석했는데, 가장 약한 고리가 유럽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과잉 복지와 노조의 경직성, 과도한 재정 지출과 포퓰리즘 정책의 남발, 진취적인 기풍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 충만한 기업가 정신의 실종, 변화에 대한 둔감한 적응력과 안보와 직결되는 핵심 에너지의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의존 등등. 유럽이 다시 부흥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구조 개혁의 과제가 있지만, 문제는 결국 정치로 귀결된다. 특히, ‘부패한 엘리트가 순수한 일반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포퓰리즘(Populism)이야 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인기만을 우선시하는 인민주의, 대중영합주의 등으로 번역되며, 마약과 같이 중독성이 강해서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노동자들의 지지로 당선되어 종국에는 국가 경제를 파탄시킨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정권이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2024년 12월 22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이 어려워진 원인으로 “진보 진영의 부상 때문이다.”라고 직격했다. 그는 독일을 예로 들어 “독일은 통일 후 경제가 어려워지자 노동 유연화를 바탕으로 한 경제개혁을 단행했으며, 노조도 일자리 보존을 위해 임금 10% 삭감을 받아들였지만, 5~7년 전부터 좌파 진영이 부상하면서 구조 개혁은 사라졌다.”라고 하면서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위기는 지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조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구조 개혁에 따른 수술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비용도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위기는 늘 기회와 함께 온다는 격언이 있는 데, 유럽은 과연 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지금 이대로는 당분간 어렵다는 전망이 크다.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부자 나라들은 정치적인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문제들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라는 예측이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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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성은…
프로야구단 히어로즈 대외협력본부장과 이준열사순국백주년사업회에서 사무총장을 거쳐 국회의원 수석보좌관, 서울시부시장 정무특보를 역임하고 서울메트로환경에서 이사회 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현재는 <알앤비리서치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